밥 한 술에 순무김치 척, 입맛이 살아납니다

늘 사랑으로 기억되는 엄마의 맛

등록 2026.08.28 14:49수정 2026.08.2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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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된통 앓았다. 평생 지병인 편두통이 최고의 아픔인 줄 알고 살았는데, 감기 몸살로 이리 힘들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에너지가 바닥이 날 줄은 몰랐다. 수액을 맞고 겨우 회복 중이다.

입맛을 잃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니 출근은 물론 일상을 유지할 기초 에너지가 바닥이 나 삶의 질이 엉망으로 얽혀 우울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이제 정말 건강을 챙겨야 할 때라며 걱정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고, 나는 이렇게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생활 습관과 음식 섭취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의 '수무김치'

 딸이 강화 풍물시장에서 사 온 순무김치, 정성을 먹는다.
▲ 딸이 강화 풍물시장에서 사 온 순무김치, 정성을 먹는다. 한현숙

일상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와중 뜻밖의 음식에서 기운을 차릴 입맛을 회복했는데, 그 음식은 바로 순무김치였다. 둘째 딸이 친구와 함께 강화에 놀러 갔다가 그곳 풍물시장에서 사 온 김치였다. 강화 특산물로 유명한 맛김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음식 중 하나이다. 딸도 그것을 알기에 꼭 챙겨야 할 것처럼 시장바구니에 담았을 것이다.

순무는 보통 팽이 모양의 둥근 모습으로 아랫부분에 보라색 빛깔을 띤다. 특별한 비료가 없어도 잘 자랄 정도로 기르기가 쉬워 재배가 까다롭지 않은 작물이다. 심지어 추운 곳이나, 물이 충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고 하니 참 고마운 채소 중 하나이다. 일반 무에 비해 수분은 좀 적은 편이나 배추 뿌리와 비슷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특유의 이 쌉싸름한 맛을 좋아한다.

겨울철 채소가 부족하다 싶은 식단에 순무김치는 빠질 수 없는 건강한 반찬이었다. <동의보감>에선 '여러 가지 채소 중 이롭기만 하고 해로운 것이 전혀 없는 가장 좋은 채소이다'라고 순무를 극찬했다고 한다. 강화는 순무가 잘 생산되기로 이름난 곳인데, 강화도 출신의 철종도 때마다 순무를 찾을 정도였다고 하니 순무의 효능(소화 촉진, 면역력 강화, 뼈 건강)과 영양가는 역사적으로 오래 이어진 듯하다. 전북 무주도 순무 생산지로 유명한 곳인데, 강화 순무와 달리 하얀 무색인 게 특징이다.

강화가 고향인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순무김치를 맛보았다. 강화 지역에서는 '수무'라고 불러 원래 이름이 '수무김치'인 줄 알고 자랐다. 엄마의 '수무김치'는 두껍지 않게 나박 썰은, 보랏빛이 보일락 말락 하는 모양에 고춧가루 양념과 시원한 젓갈이 잘 버무려진 맛난 김치였다.


김장철이면 어마어마한 양의 순무를 순무 줄기와 함께 김치 양념에 척척 버무려 내던 생전 엄마 모습이 선하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한참 순무김치를 만들다, 맛을 보고 뭔가 부족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짓으로 양념통을 가리키면,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엄마의 의중을 기막히게 알아채고 양념 뚜껑을 열어 엄마를 도왔던 기억이 그저 그립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집 김칫독이나 김치냉장고에는 순무김치가 떨어지지 않고 늘 있었다. 순무의 사각거리는 식감과 달큼하면서도 쌉싸름한 맛과 향기, 톡 쏘는 알싸한 김치 국물까지 더부룩한 체기라도 있을 때는 금방이라도 속을 뻥 뚫어버리는 최고의 반찬이었다.


흔한 반찬이라 여기며 수시로 먹다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순무김치는 귀하디귀한 추억의 반찬이 되었다. 몇 해 동안은 강화와 가까운 김포에 사시는 이모 덕분에 해마다 순무김치를 맛볼 수 있었는데, 이마저 시간이 흐르자 멈춰버렸다.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우던 김치통은 하나둘 그 수가 줄더니 이제는 김치가 귀한 집이 되었다. 열무김치나 오이소박이로 김치통을 가끔 채우기도 했으나 엄마의 그리움과 추억이 묻어 나는 김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모는 수년간 김장김치를 챙겨주었다. 이곳에 늘 순무김치가 담겨 있었다.
▲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모는 수년간 김장김치를 챙겨주었다. 이곳에 늘 순무김치가 담겨 있었다. 한현숙

따스한 맛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음식

지난주 병이 나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겠다고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딸이 순무김치를 사 온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딸들에게도 순무김치는 할머니를 떠올리고, 그날의 따스한 맛을 사랑으로 기억하는 특별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여름철 재료라서 그랬을까? 두껍게 듬성듬성 자른 순무김치는 특유의 보랏빛도 찾기 어려워 순무를 얄팍하게 썬 엄마표 순무김치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지만, 그 알싸한 향기는 금방 추억을 소환하여 마치 엄마의 손맛인 양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밥을 한술 떠 그 위에 순무김치를 얹어 모처럼 맛나게 먹었다. 쌉싸름한 김칫국물까지 떠먹으며 입맛을 회복한 것이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 딸에 대한 고마움, 추억의 소중함을 얹어 순무김치를 음미한 것이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밥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밥심으로 살아간다.

평생 먹은 밥상에는 수많은 추억이 함께 한다. 힘들 때 밥 먹었니? 만큼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이 또 있을까. 외로울 때, 같이 밥 먹자처럼 정을 전하는 말이 또 있을까. 소중한 한 끼를 떠올리고, 밥그릇에 담긴 사랑과 수고를 돌아보고, 나에게 전해진 그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며 힘을 내 보리라.

엄마가 이번에 보내온 사랑의 선물은 아마도 순무김치인가 보다. 몸이 좀 나아지면 나도 엄마처럼 순무김치를 만들어 사랑과 추억의 릴레이를 하듯 딸들에게 할머니의 정을 전해야겠다. 노란색 십자가 모양으로 피는 순무꽃! 이래저래 순무는 나에게 사랑의 십자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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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순무김치 #특산물 #할머니 #십자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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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국어 교사, 다음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 가족여행, 반려견, 학교 이야기 짓기를 좋아합니다. <엄마를 잃어버리고>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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