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듣기
  • 엄마가 죽었는데 안 슬프다는 남자... 이제 의문이 풀렸다

    [박형숙 소설가의 촉]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등록 2026.09.01 14:32수정 2026.09.01 14:32
    0
    원고료로 응원
    "언제 끝날까요?"
    "그러게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아파트 주민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더위가 물러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처서에는 모기 입이 삐뚤어질 정도로 시원해진다는데 올해는 아닌가 보다. 여전히 뜨거운 태양열, 여전히 가시지 않은 열대야.


    그러는 동안 몇 장의 부고장이 날라 온다. 폭서에는 노인들이 세상을 많이 뜬다고 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지만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해마다 여름 더위는 갈수록 더 길어지고 더 맹렬해지고 있는데 정말 지구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우리 앞에 놓인 일상은 변함없다.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위해 저마다의 일터에서 일하고, 더위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 되풀이되는 일과, 변함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 인생은 이토록 뻔한 도돌이표인가? 하는 의문. 이럴 때 떠오르는 책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다. 이상하게도 한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에 시달릴 때면 늘 이 책이 어른거린다.

    시지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푸스, 시지프스, 시지프(Sisyphe), 드물게는 시쉬포스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시지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푸스, 시지프스, 시지프(Sisyphe), 드물게는 시쉬포스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위키미디어 공용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는 신을 속인 죄로 거대한 바위를 가파른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정상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돌. 그러면 다시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 시지프에게 이 형벌은 영원히 반복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무한반복. 인생이 고통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이따금 찾아 든다.

    살아가는 일이 이토록 힘들다면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이 세상은 결코 그 답을 주지 않는데, 이 양자의 충돌에서 '부조리'가 싹튼다고 보았다. 의미를 찾지 않으면 부조리도 느끼지 않으련만.

    <시지프 신화>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책장을 넘겼던 게 분명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공중전화 부스라는 하나의 이미지였다.


    "한 사내가 유리 칸막이 저쪽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무언극 같은 그의 뜻 모를 몸짓은 보인다."

    분명 전화를 거는 사내에게는 어떤 절박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에는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교 내내 나는 그런 유리 칸막이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타인에 대한 이해를 차단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숨는 도피처 안에?


    의문투성이였던 <이방인>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담배를 입에 문 반항아다운 사진 때문이었을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의 작품과 함께 흘러갔다. 처음 읽은 것은 <이방인>이었다. 성장통처럼 주변 세계에 대해 갖게 된 낯선 이방인 의식, 그래서 제목에서 느낀 친밀감.

    하지만 <이방인>의 세계는 너무나 달랐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주인공 뫼르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는 애인을 만나고, 극장에 가고, 바닷가를 서성인다. 그러다가 바닷가에서 아랍인에게 발사하는 총알. 왜? 태양 때문에. 그게 말이 되는 걸까? 온통 의문투성이였던 <이방인>. 뫼르소와 나 사이에는 불가해한 심연이 놓였다. 이런 게, 문학이야. 그 심연을 뛰어넘기 위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의문 부호를 삼켰다.

    얼마 전, 한 독서 모임에서 몇십 년 만에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한 토론을 했다. 실존주의나 현상학에 대한 철학적 반박이 잠시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을 뿐, 그 핵심 메시지는 간단했다. 무의미함에 굴복하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것.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문득 오래된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의 유명한 첫 문장이 나의 현실이 되었던 날. 대학교 2학년 겨울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밤,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부고를 들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듯 쓰러졌고 통곡하듯이 눈물을 쏟았다. <이방인>에 사로잡혔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신이 뫼르소처럼 냉혈한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토록 눈물이 쏟아져 내리니 나는 뫼르소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뫼르소는 내게서 지워졌다. 그와 함께 알베르 카뮈도.

    알베르 카뮈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1913년 태어난 작가. 부조리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1942년에 《이방인》을 썼고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베르 카뮈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1913년 태어난 작가. 부조리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1942년에 《이방인》을 썼고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위키미디어 공용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산문집을 통해서였다. <결혼> <여름> <안과 겉>. 사막 같았던 40대를 지나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고립', '권태', '본원적인 행복', '냉철한 검박함' '온갖 해풍을 맞받아 내며 굳건히 서 있는 아몬드나무의 순백'. 다른 곳에서는 상투적으로 느껴질 단어들이 그의 산문집 안에서는 황홀하게 빛났다. 그 빛남은 어쩌면, 알제리라는 먼 나라, 우리와는 전혀 다른 기후와 풍토를 가진 해안가의 뜨거운 햇빛에서 온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다시 펼쳐 든 <안과 겉>의 서문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발견한다.

    "예술가는 그처럼 저마다 마음속 깊이, 일생 동안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을 공급해 주는 유일한 원천을 갖고 있는 것이다......<중략>......나의 원천이 <안과 겉> 속에,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난과 빛의 세계. 그래, 이것이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누구나 자기 삶의 원천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각자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가문이, 어떤 이에게는 정신적 풍요가, 또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문득 내가 자란 산동네가 떠올랐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남산이 지척으로 보이던 곳. 가난하지만 의연했던 가족들. 날품팔이, 바보, 무당, 지게꾼처럼 세상의 낮은 곳을 일찌감치 느끼게 해주었던 이웃들. 그곳에서의 유년 시절은 부러울 게 없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내게로 곧장 달려들었으니까.

    죄 없는 아랍인을 쏘아죽인 룸펜 프랑스인. <이방인>에 대한 이런 정치적인 해석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해석에만 가둬두고 다시 읽지 않았던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다. 다시 펼쳐 든 <이방인>에서 어린 나를 본다. 과거의 미숙했던 나를, 너그러워진 현재의 내가 다시 만난다.

    우리 안의 이방인을 바라볼 차례

    바다(Mer)와 태양(Soleil)의 합성어 뫼르소(Mersault). 그는 바다와 태양의 아들이었다. 자연이 그렇듯이, 자신이 실제로 느낀 것만을 말하는 인간. 그는 정말로 어머니의 슬픔을 모르는 냉혈한이었을까?

    늙고 가난한 이웃집 노인 살라마노가 평소에는 구박만 하던 피부병 난 개가 실종되고 난 뒤 우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올 때, 거기에 귀 기울이는 뫼르소에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관습적인 감정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 뿐. 남들처럼 똑같이 느끼고 행동하라는 사회의 강요는 그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뫼르소처럼 출세도, 결혼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젊은이는 이제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환경과 삶의 조건에 의해서 그렇게 된 젊은이들. 이들은 기성세대가 중요시했던 삶의 지표들에 무관심하다. 이들이 잘못된 걸까?

    카뮈는 <작가수첩>(제1권, 1937년 8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적인 연설을 듣거나 우리 지도자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여러 해 전부터 인간적인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라곤 전혀 없다는 데 놀란다. 항상 똑같은 말로 항상 똑같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뫼르소가 재판을 받는 사법 체계, 법의 세계 또한 그보다 나을 게 없었다. 뫼르소가 재판을 받는 과정은 엄정한 심판의 과정이 아니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이를 취재하는 기자와 회개를 강요하는 성직자까지 한편이 되어 한 사람의 불운한 사람을 완벽한 죄인으로 낙인찍는 과정이었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한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방인에게 세상은 자신의 치부를 활짝 열어 보인다.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알제리의 햇빛 속에서 자란 작가 카뮈. 그의 시선에 비친, 코미디에 가까운 프랑스인들의 재판정 모습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 안의 이방인을 바라볼 차례다. 공사장, 건설 현장, 이삿짐센터,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한국어가 서툴거나 눈 주위가 까만 이방인들, 그리고 명동, 광화문, 동대문, 강남 등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이방인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사회의 어떤 위선이 그들 눈에 보일까?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이방인>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영화감독 중 영화 영상 예술과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펼치는 데에 최고에 달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른바 시네아스트로 분류되는 감독. 1967년에 제작했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이방인>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영화감독 중 영화 영상 예술과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펼치는 데에 최고에 달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른바 시네아스트로 분류되는 감독. 1967년에 제작했다. 아트시네마

    1967년 작,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이방인>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다. 선풍기나 에어컨 시설이 없는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양복을 입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제복의 윤리에 갇힌 인간들에 대한 희화화라고나 할까? <이방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두 편 더 있다. 튀르키예 감독이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2001년에 만든 <운명>과 2025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만든 <이방인>.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페이스북에도 실립니다.
    #알베르카뮈 #시지프신화 #카뮈의이방인 #우리안의이방인 #부조리철학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창작집 3권, 엔솔로지 2권을 냈다. 여성주의 논문을 썼다. 중학교에서 국어를,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쳤다. 지금은 전업 작가. 내가 생각하는 문학과 예술은? 아름다움, 새로움, 그리고 성찰. 궁극적으로는 보다 많은 이들이 향유하게 되기를 바란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반도체 앞 '시한폭탄'... 귀를 의심케 한 장관의 말 반도체 앞 '시한폭탄'... 귀를 의심케 한 장관의 말
    2. 2 누드 모델이 가운을 벗기 전에 하는 일 누드 모델이 가운을 벗기 전에 하는 일
    3. 3 가사까지 고쳐서 미얀마 군부가 뺏으려는 노래 가사까지 고쳐서 미얀마 군부가 뺏으려는 노래
    4. 4 단일시즌 '30승' 투수의 아름답지 못한 말년 단일시즌 '30승' 투수의 아름답지 못한 말년
    5. 5 '패륜 영화' 낙인... 대구서 '암살자(들)' 보기 쉽지 않은 까닭 '패륜 영화' 낙인... 대구서 '암살자(들)' 보기 쉽지 않은 까닭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