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8.28 16:43수정 2026.08.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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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려나 보다. 새벽부터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며 제법 거세졌다. 타들어 가던 여름 가뭄으로 한껏 달궈졌던 땅도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빗물을 부드럽게 머금으며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습도는 다소 높지만, 기온이 전날보다 무려 7도나 내려가니 이제야 겨우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필라테스 수업이 있는 금요일이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엄청 힘들고 숨이 차고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힘든 운동을 마치고 나면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 개운해진다. 뻐근했던 어깨와 허리도 가볍게 풀리고 마음까지 한결 가벼워진다. 오랜만에 우산을 펼쳐 들고 걸으니 우산 위로 떨어지는 토닥토닥 빗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필라테스 센터에서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바로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다. 단지 입구에 들어서자 분홍빛, 하얀빛의 무궁화꽃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너희도 그동안 오래도록 목말랐지? 실컷 목이나 축이렴.'
피식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도로 옆 나지막한 풀밭 사이를 동동거리며 바쁘게 거닐고 있는 작고 오묘한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 녀석이 여기에 웬일로 나타났을까?'
나름대로 숲과 가까운 이른바 '숲세권' 아파트에 산다지만, 평소 단지 안에서 만나는 새들이라 해봐야 시내 한복판과 별다르지 않다. 매일 보는 참새나 비둘기, 그리고 가끔 날아드는 까치나 까마귀 정도가 전부다. 인가에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희귀한 이 녀석이 길을 잃고 헤매는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반가워 여기까지 날아온 걸까. 온갖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후투티를 만나다

▲후투티 우산 쓰고 찍기가 힘들었어요.
황윤옥
내가 만난 새의 이름은 후투티다. 머리 위에 화려한 깃털 장식 같은 벼슬을 얹고 있는 독특한 새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사진을 찍으려 가만가만 다가갔다. 새는 경계심을 품었는지 머리깃을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펼쳐 보였다. 아래로 가늘고 길게 휜 부리를 이용해 잔디밭과 부드러운 흙 속을 콕콕 찔러 댔다. 먹이를 잡아먹는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고 귀여운지.
도심 한복판에서 쉽게 보기 힘든 반가운 손님을 집 앞에서 만난 덕분일까. 아득해졌던 추억 한 토막이 빗물처럼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네 살배기 어린 손자의 작은 손에 이끌려 동산 오솔길을 오르던 어느 가을날의 기억이었다.
2022년 11월의 어느 맑은 날, 어린이집을 마친 손자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꾸만 내 옷자락과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아이의 야무진 발걸음에 끌려 도착한 곳은 아파트 단지 앞쪽에 자리한 작은 동산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할머니는 여기 처음 와보는데."
"아나 여기 아주 잘 알아! 어린이집에서 숲 체험할 때 와봤거든. 길 안 잃어버리니까 나만 따라와, 할머니."
겨우 네 살이었지만 표현도 확실하고 말이 '똑' 부러지던 아이였다. 그맘때 아이는 산책길에 만나는 솔방울이나 도토리를 주머니 가득 줍고, 풀밭에 쪼그려 앉아 네잎클로버를 찾으며 세상을 탐험하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집 안 곳곳에는 아이가 수집해 온 반질반질한 돌멩이와 작은 도토리,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가득했다.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따라 오솔길을 조심조심 올라가던 때였다. 아이가 솔방울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던 바로 그때, 낙엽 더미에서 푸드덕거리며 날갯짓하는 소리가 울렸다.
"할머니, 이것 봐! 여기 이상한 새가 있어!"
"어머 어머, 저게 무슨 새야? 신기하게도 생겼네!"
나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내 새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동영상까지 찍었다. 까치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하고 오묘한 새였다. 아이와 나의 눈 속에, 그리고 카메라 렌즈 안에 그 새를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이 되어 손자를 아이 부모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거실 책장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손가락으로 책들을 요리조리 짚어가는가 싶더니 자연 관찰 책 한 권을 쏙 꺼내 왔다.
"할머니, 이것 봐! 우리가 동산에서 봤던 그 새 맞지?"
"어머나, 정말 그렇네! 이 새 이름이 후투티였구나. 아이구, 우리 손주가 책을 잘도 찾아냈네!"
눈썰미가 보통이 아닌 손자 덕분에 새의 이름도 알게 되고, 평생 잊지 못할 고맙고 다정한 추억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빗속에서 먹이를 찾느라 바쁜 후투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휴대전화 앨범을 열어 그날의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사진 속 아이의 앳되고 동그란 얼굴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보았다. 그날 동산에서 불어오던 솔바람 냄새와 도란도란 나누던 꿈의 대화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어느 곳에 있든 내 자손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마음속 깊이 빌어본다. 뜻밖에 찾아와 잊고 있던 다정한 추억을 다시 불러내 준 후투티. 오늘 나에게 기분 좋은 행운 한 조각까지 얹어다 주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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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가끔 음식 이야기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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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사이를 동동, 아파트에서 '후투티'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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