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중인 이부영 명예의장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이부영 명예의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이명옥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은 몽양 여운형의 생애를 중요한 사건 순서대로 짚어가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가 전해 준 몽양 암살에 얽힌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암살 당하기까지 12번의 테러를 당했어요. 그것이 모두 우익이 저지른 테러였을까요? 좌, 우의 테러 횟수가 비슷했어요. 몽양은 좌, 우 모두에게 암살의 위협을 받았던 겁니다."
몽양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해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했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몽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말에 숨김이 없었기에 좌. 우 양진영으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성품을 잘 이해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승만이 대통령 직무를 저버린채 미국으로 돌아가 와해의 위기에 놓인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뒤에서 이끈 인물이다.
기회를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주었더라면...
이부영 명예 의장은 다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전했다.
"윌슨 대통령이 1919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합니다.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민족들에게 희망이 되었지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조선, 필리핀, 베트남, 버마 등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를 중심으로 민족 자결과 자주를 위한 논의를 위해 대표들을 초청합니다. 그때 네루는 몽양 여운형을 콕 짚어 조선의 대표로 참석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몽양은 주변의 적극적인 저지와 방해로 그 회의에 가지 못합니다. 만약 그때 몽양이 회의에 참석해 조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확실하게 세계에 전했더라면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일은 없었을텐데..."
이부영 의장은 단호하게 말한다.
"4.3 특별법이나 5.18법이 통과된 것은 여야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일부 의원과 사람들은 5.18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몽양은 청년들한태 미래를 봤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집안에서 사회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이 청년들을 끌어안아 사회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대화하고 일할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또 농촌은 어떻습니까? 학교가 텅텅 비어 폐교가 되어가고 있어요, 입학할 아이들이 없어서요. 노인들만 남은 농촌의 노인들이 수명을 다하면 농촌의 텅 빈 곳이 되는 겁니다. 청년과 지역을 품어 안고 좌우를 넘어서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어요."

▲율곡국학진흥원 앞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세대 간, 계층 간, 진영 간, 지역 간, 정당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평등, 자유 평화 공존을 위한 몽양의 좌우를 초월한 거침없는 행보와 몽양이 추구하던 "몽양 정신" 실천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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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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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의숙"에서 피어난 "몽양의 정신" 강릉의 길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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