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루와 성벽 아래 푸른 잔디가 대비를 이루며, 600년 전 군사들의 숨결을 전해주는 듯하다
김지영
비에 적셔진 포루와 망루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당시 서른다섯의 혈기 넘치면서도 신중했던 청년 이순신 역시 이 성벽 위를 거닐었을 것이다. 장마철이나 이처럼 비가 기습적으로 쏟아지는 날이면, 그는 망루에 올라 아득히 펼쳐진 내포 들녘과 바다 방향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젊은 장수의 고뇌, 그리고 이름 없이 성벽을 지키던 조선 군사들의 고초가 빗소리에 섞여 아련히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차가운 갑옷을 입고 장대비를 맞으며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칼날 같은 긴장감,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이 망루 구석구석에 짙게 스며있음이 느껴졌다.
무기 수레와 푸른 잔디의 침묵

▲ 비 내리는 잔디밭과 옛 무기들의 정적
김지영
성 내부 한편에는 조선 시대 사용되었던 신기전과 무기 수레, 군사들의 모습이 모형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과거의 유물로 무심코 지나쳤을 무기들이 이날따라 유독 다르게 다가왔다. 비에 젖은 무기 수레 위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거대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개개인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위태로웠을까. 서산과 태안 일대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밤낮없이 훈련받고 성을 쌓아 올렸을 민초들의 땀방울이 눈앞에 선연했다. 그들의 무거운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 평화로운 성안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것이다.

▲ 군사 요충지였던 해미읍성 내부에 전시된 옛 무기 수레들과 빗물에 젖은 잔디광장
김지영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지자 성벽 안쪽의 푸른 잔디밭과 아담한 목재 흔들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긴 세월 동안 칼바람과 포성을 견뎌낸 군사 요충지가 이제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휴식과 안식을 건네는 평화로운 공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 극적인 시간의 반전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 아닐까.
성벽을 따라 흐르는 세월과 오늘의 우리

▲ 성벽 아래 조경수들과 아담하게 조성된 길들이 비에 젖어 단정하고 아늑한 풍경
김지영
망루 주변으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 옆에는 정돈된 풀들이 빗방울을 모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지막한 언덕 위로 연이어 보이는 포루들의 지붕은 거친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낸 파수꾼의 성실함을 닮아 있었다.
성 벽면 하나하나에 쌓인 돌들의 크기와 모양은 저마다 달랐다. 투박하고 큼직한 돌부터 작은 틈새를 메우고 있는 조그만 돌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없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600년의 비바람을 견뎌 냈듯, 우리의 삶 또한 저마다의 무게와 고초를 견디며 서로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비 오는 날의 해미읍성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지쳐갈 때, 옛사람들의 묵직한 삶의 궤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대한 인문학적 쉼터였다. 청년 이순신이 품었던 고뇌도, 이름 모를 군사들이 견뎌낸 고단함도 모두 이 성벽에 스며들어 오늘을 사는 나에게 무언의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빗소리 속에서 나선 성문

▲ 단정하고 아늑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김지영
어느덧 성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처음 들어섰던 성문 앞으로 돌아왔다. 성문을 들어설 때의 마음과 나설 때의 마음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일상의 자잘한 근심과 번민을 품고 들어섰던 성안에서, 빗속의 망루와 성벽이 건네는 단단한 울림을 안고 밖으로 나섰다.
비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젖은 땅을 적시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맑아지고 묵직해졌다. 서산 해미읍성은 그렇게 비 내리는 늦여름 오후, 성벽 위에 세월과 삶을 함께 흘려보내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고 있었다. 내포 땅의 역사를 품은 이 아름다운 성곽의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며, 빗속의 발걸음을 가볍게 옮긴다.

▲ 해미읍성 진남문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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