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흔히 이러한 불가역적인 기술적 비극을 이야기할 때 '오펜하이머'의 이름이 따라온다. 비극적 고뇌에 찬 과학자, 자신이 만든 악마를 바라보며 절망하는 지성인의 초상.
오펜하이머는 국가안보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폭탄을 만들었지만, 남은 평생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파국을 똑똑히 직시했고, 끊임없이 사죄하고 괴로워했다. 그가 그토록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일을 하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맨해튼 프로젝트의 전제가 달라졌을 때 망설임 없이 연구소를 걸어 나갔던 과학자 조지프 로트블랫처럼, 그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써의 '거절'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전장에 투입하는 이들에게 '오펜하이머 순간'이라는 미화는 온당치 않다. 그들은 고뇌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을 짜는 개발자, 드론을 조립하는 엔지니어, 타격을 승인하는 지휘관, 세금으로 만들어진 자본을 대어 국가주도로 무기를 만들도록 촉진하는 정치인까지, 그들의 책임은 잘게 쪼개져 공기 중으로 산산이 분산된다. 자신이 개발한 코드의 토막들이 누구를 죽음으로 몰고 갈지, 어떤 피를 흘리게 할지 관심 두지 않고, 그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장의 참상을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 올리듯 무감각하게 소비하는 일상, 모니터 너머의 비극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다가왔다가 이내 말끔하게 잊힌다.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실의 사정도 비슷하리라. 코드 몇 줄을 입력하는 엔지니어의 손길에는 어떠한 피비린내도 묻어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은 이토록 완벽하게 세척되고, 살상은 이토록 멸균된 일상의 형태로 수행된다. 그 깔끔한 일상성 속에서 인간이 붙잡아야 할 최소한의 죄책감마저 산뜻하게 휘발되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라는 마법의 단어는 상대방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탈바꿈시키고, 그 안보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내부의 목소리마저 '불온한 적'으로 몰아세운다. 눈앞의 타인을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표적'으로 지워버려야만 작동하는 전쟁의 생태계. 그 생태계의 끝에서 인간들은 기계에 단죄와 살상의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제 내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겠다는 안도와 함께.
2026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율살상무기체계 금지협약 도출을 위한 정부전문가회의가 진행된다. 이 회의를 5일 앞두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미르야나 스폴랴리치 에거(Mirjana Spoljaric Egger)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총재가
공동성명을 냈다.
"우리는 이제 기계에 의한 인간의 자율적 표적 지정이라는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데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We are now dangerously close to crossing a moral red line: the autonomous targeting of humans by machines)."
리비아의 거리에서, 바흐무트의 들판에서, 자포리자의 프로판 가스 탱크시설에서, 기계의 알고리즘이 0과 1의 계산 끝에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그 살상의 방아쇠를 당긴 손은 누구의 것인가. '적'이라는 라벨만 붙으면 그 어떤 질문도 생략된 채 목숨을 소거할 수 있는 세계. 타인을 비인간화함으로써야 겨우 유지되는 이 아슬아슬한 체제 속에서, 도대체 이 세계가 말하는 '안전'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안전'을 볼모 삼아 모두를 더욱 안전하지 않은 세계로 달려가는 지금, 당신은 그 '선'을 넘었는가, 밟고 서 있는가, 넘지 않기로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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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대표, 평화와 교육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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