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부터 돌까지, 작품의 언어가 된 재료

서해미술관 '현대회화, 파괴와 창조' 개막… 오는 30일까지 전시

등록 2026.09.03 09:29수정 2026.09.0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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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우_Romer Tor-로마식개선문,2015,Digital C-Print,Solvent,117x84cm
▲ 이은우_Romer Tor-로마식개선문,2015,Digital C-Print,Solvent,117x84cm 서해미술관

회화는 어디까지 회화일 수 있을까. 유리를 녹이고, 흙을 뭉치고, 나무와 돌을 붙인다. 이미 완성된 그림 위에 비즈를 얹기도 하고 옻칠로 물결을 만든다. 붓과 물감, 캔버스를 떠올리던 회화의 익숙한 모습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런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전시가 충남 서산에서 열린다. 서해미술관은 오는 8일부터 30일까지 기획전 '현대회화, 파괴와 창조'를 개최한다. 고성희, 박삼칠, 이경우, 이상록, 이은우, 임재광, 장규돈, 정태궁, 황선익 등 9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번 전시에서 '파괴'는 무언가를 없애는 행위라기보다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가깝다. 작가들은 회화의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유리와 도조, 옻칠, 목판, 사진, 돌, 혼합 매체 등 서로 다른 재료를 끌어들인다. 무엇을 그렸느냐 못지않게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작품을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유리·흙·옻칠·돌… 재료가 곧 작품의 언어가 되다

 고성희_서쪽바다의 기억,2026,slumped,bk9유리,20x25x6cm
▲ 고성희_서쪽바다의 기억,2026,slumped,bk9유리,20x25x6cm 서해미술관

고성희의 '서쪽바다의 기억'은 열을 받아 형태가 변한 유리 안에 문자와 흔적을 새겼다. 단단하면서도 투명한 유리의 성질이 바다에 대한 기억과 겹쳐 보인다. 박삼칠의 'The Rhythm of Nature-Series'에서는 거칠게 굳은 붉은 흙 사이로 작은 색유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흙과 유리, 불이라는 서로 다른 물성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임재광_개입하기 2020418,2025,Beads,Resin on Commercial decorative painting,69x158cm
▲ 임재광_개입하기 2020418,2025,Beads,Resin on Commercial decorative painting,69x158cm 서해미술관

임재광의 작업 방식은 조금 다르다. '개입하기 2020418'은 이미 만들어진 상업용 풍경화 위에 비즈와 레진을 더했다. 남이 만든 익숙한 이미지에 작가가 손을 대면서 원래 그림은 전혀 다른 장면으로 바뀐다. 이은우는 디지털 프린트에 솔벤트를 사용해 이미지를 지우고 흐트러뜨리며 다시 구성한다.
 이경우_Wave-Circulation II 2026.Mixed Media, 옻칠, 58x38cm
▲ 이경우_Wave-Circulation II 2026.Mixed Media, 옻칠, 58x38cm 서해미술관

옻칠을 이용한 이경우의 'Wave-Circulation II', 목판과 돌을 결합한 황선익의 '내 안의 숲-The Forest Within ME', 목재 위에서 꽃의 형태를 확장한 정태궁의 'Providence-도라지꽃'도 평면 회화의 경계를 넘어선다.

작품의 모습과 재료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재료를 단순히 그림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료 자체의 질감과 변화, 그것을 다루는 행위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전시 제목이 말하는 '파괴와 창조'도 여기서 만난다. 익숙한 방법을 버린 자리에 새로운 표현이 생기고, 기존 형식의 경계를 흔드는 일이 또 다른 창조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 새로운 것들

전시와 연결된 특별 강연에서는 이 문제를 미술 밖으로 확장한다. 오는 12일 오후 1시, 이경교 시인·명예교수가 '현대성, 파괴와 창조'를 주제로 강연한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 중국의 양주팔괴, 선불교의 혜능, 로만 야콥슨과 T. S. 엘리엇, 에드워드 기번과 에드워드 사이드 등을 넘나들며 새로운 사상과 예술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변방'에 대한 질문이다. 새로운 문화와 예술은 언제나 중심에서 시작됐을까. 강연은 서해미술관이 자리한 창리의 포구와 지명, 지역의 역사까지 불러들여 중심에서 벗어난 장소가 가진 자유와 파격의 가능성을 짚는다.

결국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작품의 정답을 요구하기보다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회화의 재료와 형식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거기서 무엇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까.

'현대회화, 파괴와 창조'는 오는 9월 30일까지 서해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공연·교육 프로그램 문의는 서해미술관(041-664-7004)으로 하면 된다.

 이상록_그날이 오면(When the day comes),2021,혼합재료,80x80cm
▲ 이상록_그날이 오면(When the day comes),2021,혼합재료,80x80cm 서해미술관

 장규돈__집안의 네 사람, 2021, 나무 판넬에 유채와 템페라 에멀젼, 182x182cm
▲ 장규돈__집안의 네 사람, 2021, 나무 판넬에 유채와 템페라 에멀젼, 182x182cm 서해미술관

 정태궁_Providence-도라지꽃,2025,Mixed media on wood,100x80cm
▲ 정태궁_Providence-도라지꽃,2025,Mixed media on wood,100x80cm 서해미술관

 박삼칠_The Rhythm of Nature-Series,2026,Mixed Clay,Red Clay,Terra-Sigillate,Color Glass,Variability
▲ 박삼칠_The Rhythm of Nature-Series,2026,Mixed Clay,Red Clay,Terra-Sigillate,Color Glass,Variability 서해미술관

 황선익_내 안의 숲-The Forest Within ME,2026,목판,Acrylic,돌,180x60cm
▲ 황선익_내 안의 숲-The Forest Within ME,2026,목판,Acrylic,돌,180x60cm 서해미술관
#서해미술관 #파괴와창조 #현대회화 #미술전시 #이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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