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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에서 장어탕 먹고 입가심으로 마셨는데

    가을의 신호탄 절기 백로... 다정하고 고마운 맛, 티백이라도 괜찮다

    등록 2026.09.07 09:23수정 2026.09.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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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진남관. 파란 하늘의 쨍함 만큼 늦더위가 무서운 수준이었다.
    ▲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진남관. 파란 하늘의 쨍함 만큼 늦더위가 무서운 수준이었다. 노시은

    7일은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 백로(白露)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하얀 이슬'이라는 뜻이죠.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뚝 떨어지면서 이른 아침이면 풀잎마다 영롱하고 맑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본격적인 가을의 신호탄 같은 시기입니다.

    옛사람들은 백로 무렵의 서늘해진 바람을 맞으며 들판의 벼 이삭이 튼실하게 여무는 것을 살폈고,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커지면서 단맛이 깊어진 포도를 맛보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달력에 적힌 '백로'라는 두 글자를 보며, 이제 끈적하고 무더웠던 여름은 정말로 물러가고 제법 서늘하고 운치 있는 가을이 오겠구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우리의 계획이나 달력의 날짜대로 순순히 흘러가 주지 않더군요. 백로를 며칠 앞두고, 저는 박여사님(엄마)을 비롯한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2박 3일 일정으로 여수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을의 초입이니 선선하고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걷기 좋을 거라 예상했던 저의 순진한 기대는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달력상의 절기는 분명 하얀 이슬이 맺힌다는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한낮의 여수 날씨는 마치 한여름의 연장전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펄펄 끓어올랐거든요.

    가족들을 이끌고 온 여행이니만큼 마음의 부담도 컸습니다. 징글징글한 늦더위 속에서 어르신들의 컨디션을 살피고, 식당과 동선을 체크하며 걸음에 맞춰 걷다 보니 짐을 챙기며 상상했던 여유롭고 우아한 여행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제 체력은 여행 첫날부터 금세 바닥을 드러내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렸죠.

    그렇게 늦더위와 씨름하며 여행 첫날의 일정을 간신히 마치고, 예약해 둔 한옥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고즈넉한 서까래와 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향을 맡으니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돌려지더군요. 더위에 지친 어르신들도 피곤하실 테니,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내어드리며 쉬어야겠다 싶어 서둘러 짐가방을 열었습니다.

     여수 밤바다의 풍경은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 여수 밤바다의 풍경은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노시은

    사실 이번 여행을 위해 집에서부터 아주 정성껏 찻잎들을 챙겨두었거든요. 오랜만에 친척 어르신들과 다 함께 모이는 자리인 만큼, 백로 무렵의 서늘한 저녁 공기에 어울릴 만한 좋은 차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짐가방을 아무리 뒤집어엎고 구석구석을 살펴도 그 귀한 찻잎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기억을 되짚어보니, 꼼꼼히 챙겨둔 찻잎 상자를 찻장 위에 덩그러니 두고 출발해 버렸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멋진 한옥이라는 완벽한 배경이 주어졌고 차를 마실 시간도 넉넉한데, 정작 가장 중요한 찻잎이 통째로 빠져버린 이 기막힌 상황에 그저 헛웃음만 났습니다. 결국 차 한 잔의 여유는 미뤄둔 채, 다들 기절하듯 첫날밤을 보내야 했죠.

     백로 즈음에는 살이 오른 장어를 먹으며 몸을 보신해주는 것이 좋다.
    ▲ 백로 즈음에는 살이 오른 장어를 먹으며 몸을 보신해주는 것이 좋다. 노시은
     장어구이도 빠뜨릴 수 없는 보신의 음식!!
    ▲ 장어구이도 빠뜨릴 수 없는 보신의 음식!! 노시은

    이튿날이 밝았습니다. 어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뙤약볕 속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선 둘째 날 아침 겸 점심 메뉴는 여수의 명물, 통장어탕과 장어구이였습니다.


    사실 백로 무렵은 여름내 더위에 시달리며 땀으로 빠져나간 기운을 달래고, 다가올 추운 계절을 대비해 몸을 든든하게 채워두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예로부터 기후가 비슷한 이웃 나라 중국의 남부 지방 등에서는 백로 무렵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어를 먹으며 기운을 보충하는 절기 풍습이 전해 내려오기도 하죠.

    뚝배기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뭉근하고 진한 장어탕 한 그릇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기름진 장어구이를 입에 넣는 순간 그 절기의 풍습을 온몸으로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더위에 지쳐 텅 비어있던 속이 뜨끈하고 진한 국물로 채워지니, 바닥났던 체력이 훅 하고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래서 옛사람들이 가을 길목에서 장어를 챙겨 먹었구나!"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맛이었습니다. 그 든든한 장어 요리 덕분에 남은 일정을 무사히 버텨낼 묘약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한숨 돌리며 마시는 녹차 한 잔. 티백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 한숨 돌리며 마시는 녹차 한 잔. 티백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노시은

    장어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오후 일정을 보낸 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던 시간. 정성껏 준비한 찻잎이 빠져버린 휑한 빈자리에는, 혹시나 싶어 파우치 구석에 비상용으로 챙겨두었던 일본 센차(煎茶)와 호지차 티백이 등판했습니다.

    제가 애초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좋은 다구를 멋지게 세팅하고 정성을 다해 찻잎을 우리는 우아한 그림은 아니었죠. 하지만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툭 던져 넣은 그 평범한 티백 하나가 그날따라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바다가 보이는 한옥에 앉아 마시는 녹차 한 잔의 위로.
    ▲ 바다가 보이는 한옥에 앉아 마시는 녹차 한 잔의 위로. 노시은

    한옥에 편안하게 주저앉아 유리 티포트 속에 우러나는 센차의 맑은 연둣빛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늦더위에 지치고 종일 어르신들을 챙기느라 바짝 긴장했던 몸을, 센차 특유의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 시원하게 씻어내 주었습니다. 뒤이어 맛본 호지차의 둥글고 구수한 풍미는 무겁게 굳어 있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듯했죠.

    꼭 격식을 차린 대단한 차가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지친 하루의 한가운데서 따뜻한 온기와 작은 여유를 채워주는 이 소박한 티백 한 잔이, 그 순간 제게는 세상 어떤 비싼 차보다 달고 깊은 위로가 되어주었으니까요.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참으로 다정하고 고마운 맛이었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한 2박 3일의 여수 여행은 든든한 장어탕이 준 에너지와 소박한 티백 한 잔의 위로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전주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숨을 고르고 있어요. 집에 돌아가선 저를 다소곳이 기다리던 찻잎들을 맛있게 우려 차근차근 마셔주려 합니다. 백로가 지나고 나면 이 미련 가득한 늦더위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고, 청명하고 선선한 진짜 가을바람이 불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시은작가 #스누피홀릭 #백로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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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비즈니스(출간·강의·글작업) 문의: peanutshol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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