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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을 합니다, 왜냐하면

    '슬기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가 기술과 AI에 위협받고 있다면 억측일까

    등록 2026.09.07 10:32수정 2026.09.0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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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차엔 내비게이션이 없다.
    ▲ 내 차엔 내비게이션이 없다. capnsnap on Unsplash

    내 차엔 내비게이션이 없다. 차를 샀을 당시 장착된 게 있긴 하지만, 몇 해 전 업체가 문을 닫아 도로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가 없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지금 내비게이션을 켜면, 차가 배가 되어 바다를 가로지르고, 비행기가 되어 도로가 없는 산과 들을 날아다닌다.

    업데이트가 안 된다기에 새것을 구매하려고도 했는데 턱없이 비싸서 발길을 돌렸다. 과장하자면, 신제품의 가격이 공임까지 포함해서 얼추 내 차의 보험가액과 맞먹었다. 햇수로 14년 된 수동 기어 차량이어서 업체 사장이 차량 내부를 둘러보더니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짓긴 했다.


    막상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적이 불편하고 뭔가 허전했다. 그다지 오래전도 아닌데, 차에는 두툼한 전국 교통 지도 한 권쯤은 실려 있었고, 내비게이션 없이도 전국 방방곡곡을 잘만 돌아다녔다. 어디나 도로 표지판이 잘 정비되어 있어 좁은 지방도까지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두 달이 지나자,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운전하는 게 금세 익숙해졌다. 도심의 일방통행로만 제외하면, 예전처럼 도로 표지판에 의존해서 찾아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외려 내비게이션 화면과 차창 밖을 동시에 살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내비게이션에 길들면서 시나브로 잃어버린 '길눈'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예전엔 한 번 와 본 길은 웬만해선 잊어버리지 않았고, 도로 번호만 보고도 동서남북 방향을 읽어냈다. 자주 오가는 길이라면 도로변 건물의 형태와 이름까지도 두루 꿰고 있었다.

    딱히 대단한 능력은 아니지만,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운전한다는 데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까지 생겼다. 핸들만 잡으면 과속을 일삼았던 잘못된 운전 습관도 조금씩 바루어지는 느낌이다. 곳곳에 설치된 과속 단속 카메라의 위치를 알 수 없으니 미리 조심하게 되는 거다.

    내비게이션을 없애고 되찾게 된 '능력'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는 운전에 자신감이 붙자, 마음속에서 연쇄적인 '레트로' 현상이 일어났다. 폐지함에 내다 버리려다 아까워 처박아둔 지도책을 다시 꺼냈고, 운전석 옆 사물함에 메모장과 볼펜을 올려두었다. 덩달아 먼지만 수북했던 음악 CD도 다시 꺼내 차에 실었다.

    이런 나를 두고, 한 지인은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고 있냐며 한껏 조롱했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개발한 첨단 기술을 거부하는 퇴행적 사고라는 거다.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이를 활용하지 않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박하듯 '길눈'을 예로 들며 사라져가던 능력을 되찾게 됐다며 농반진반 답했다. 그는 도중에 말을 끊더니 이미 첨단 기술로 대체된 그 따위 능력은 더 이상 능력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이젠 첨단 기술을 필요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능력이 진짜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머지않아 차량 운전은 인간의 능력을 요구하는 노동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확신에 차서 말하는 그도 답변을 주저하는 게 있었다. 첨단 기술이 영원히 대체하지 못할 인간의 능력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었을 때다. 그는 두루뭉술 첨단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누리는 능력이라고 눙치며, 대뜸 21세기에 원시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며 키득거렸다.

    AI가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현실을 보건대,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진 않았다. 틀린 말 하나 없어 보이는 그의 답변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자극했다. 모든 능력이 대체되어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없어진다면, 종국엔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재조차 부정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기실 과학 기술의 발전사는 곧 인간의 능력이 퇴화한 역사이기도 하다. 나침반이 발명되면서 별자리를 읽는 눈이 멀었고, 전자계산기가 보급되면서 암산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졌다. 이젠 스마트 기기가 보편화하면서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잊어버릴 만큼 기억력이 감퇴했다. 편리함과 본연의 능력을 맞바꾼 셈이다.

    특히 스마트폰을 제 몸처럼 여기고 모든 걸 AI로 해결하려 드는 요즘 아이들의 경우엔 더욱 우려스럽다. 밤하늘 별자리를 통해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경우가 드물다. 또, 두 자리 숫자의 곱셈은 물론, 덧셈과 뺄셈조차 버거워한다. 종이에 써서 계산하는 것조차 번거롭게 여겨 전자계산기부터 찾는다.

    부모님 전화번호를 정확히 기억하는 아이도 거의 없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데 굳이 외우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한 아이의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당황했던 적도 있다. 그는 인간의 뇌는 고급 정보를 입력하고 활용하는 데 쓰이도록 아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모의평가 때 국어 영역의 긴 지문을 읽어내지 못해 그냥 찍고 넘기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오랫동안 이미지와 짧은 영상에 길들어진 탓이다. 그들이 종이 교과서보다 PDF 교과서를 선호하는 건, AI가 대신 핵심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해 준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교육을 통해 갖추어야 할 지적 역량의 본질이 글의 맥락을 파악해 추상화할 줄 아는 능력일진대, 이를 통째로 AI에 의존하려는 모양새다. 이러다 자칫 창의적 문제 해결 과정은 물론, 자기 성찰까지 AI가 대신할지도 모른다. 결국 AI가 자신과 동일시되는 셈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 이떤 세상이 펼쳐질까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학명 호모 사피엔스가 AI에 위협받고 있다면 억측일까. 운전도, 연산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죄다 인간의 뇌와 손을 떠나면, 남는 거라곤 두 발로 걷고 뛰는 능력뿐이다. 수십만 년 전 지구상에서 활동하던 호모 에렉투스 시절의 인류로 뒷걸음질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하긴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성싶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 건의하는 사항 중에 건물의 승강기를 자유롭게 이용하게 해달라는 게 맨 앞자리다. 장애인 등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위한 시설인 데다 고작 4층짜리 건물인데도 막무가내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댄다.

    지적 역량부터 체력과 운동 능력까지 날이 갈수록 퇴화하는 느낌이다. 등하교 때도 부모님이 픽업하고, 체육 수업 때 뛰는 것도 강요할 수 없는 지금 아이들에게 일과 중 계단 오르내리기는 사실상 하루 중 유일한 운동이다. 학교가 평소 승강기 사용을 제한하는 것도 그래서다.

    "많이 움직이고 몸을 불편하게 할수록 건강해지고,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지 않고 머리를 불편하게 할수록 똑똑해지는 법이다."

    AI와 스마트 기기 과의존의 폐해를 지적하기 위해,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한 결과 '길눈'이 되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비유 삼아 들려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연신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뿔싸. 그들은 태어나 내비게이션이 없는 차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길눈'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몰랐다.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러다이트 #호모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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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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