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9.07 10:35수정 2026.09.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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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이 완연한 9월의 첫 번째 일요일 오후. 청명하고 높은 하늘 아래 하얀 구름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성곽의 웅장함을 대변하는 "진남문" 입구에는 붉은 철릭을 입은 수문장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섰다.

▲ 조선 시대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의 모습
김지영
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의 고즈넉함 대신 들썩이는 리듬이 귓가를 때린다. "징~ 꽹그랑 꽹꽹!"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꽹과리 소리다. 탁 트인 푸른 잔디밭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언가에 홀린 듯 박수를 치고 있었다.

▲ 넓고 푸른 잔디밭 위로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모여 서산 농악 발표회를 즐기고 있다
김지영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서산 농악 원형발표회'가 한창이다. 600년 전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아 올린 군사 요충지이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의 현장이 오늘은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신명 나는 놀이판이 되었다.
600년 성벽을 흔든 신명
삼색 띠를 두른 풍물패가 넓은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역동적인 진법을 펼친다. 상모를 쓴 잽이들이 고개를 힘차게 젖힐 때마다 기나긴 하얀 꼬리가 파란 하늘에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 삼색 띠를 두른 서산 농악 풍물패가 푸른 하늘 아래서 신명나는 상모돌리기를 선보이고 있다
김지영

▲ 해미읍성 가을 하늘에 수놓은 상모돌리기
김지영
무겁게 내려앉았던 역사의 무게를 잠시 덜어내듯, 풍물패의 가락은 경쾌하고도 거침이 없었다. 그 열기 속에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한 연희자와 눈이 마주쳤다. 무대가 끝난 후 잠시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 보았다.
"어르신, 소리가 참 좋아요?"
슬쩍 말을 건네자, 어르신은 충청도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정감 있는 억양으로 답했다.
"워뗘? 우리 가락이 맴을 확 뚫어주덜 않간? 600년 된 성곽 안에서 치니께 소리가 더 찰지고, 흩어지덜 않아서 좋은 겨. 옛날 우리 조상님들도 농사짓다 힘들면 다 이리 모여서 징 치고 춤췄을 거 아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 우리 가락에 대한 자부심과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세대를 잇는 가슴 벅찬 울림
그분의 말처럼, 해미읍성의 성벽은 바깥의 소음을 막아주고 안쪽의 소리를 모아주는 거대한 울림통 같았다.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장구를 치는 무리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 해미읍성 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은 연희자들이 장구를 치며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지영

▲ 연희자들이 다음 순서를 준비하기 위해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지영

▲ 해미읍성 잔디광장에서 열린 서산농악 원형발표회의 흥겨운 풍경.
김지영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손을 잡고 걷는 노부부, 그리고 신기한 듯 풍물패를 따라다니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까지. 지역 소멸과 공동체 붕괴를 걱정하는 시대라지만, 이곳 해미읍성 안에서만큼은 세대 간의 단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꽹과리가 길을 열고 징이 포용하며 장구가 흥을 돋우는 농악의 원리처럼, 다양한 세대가 하나의 가락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사소한 일상의 장면이었지만, 그 어떤 거창한 사회적 정책보다도 더 강렬하게 '공동체의 회복'을 보여주는 듯했다.
옛 성벽이 품어낸 새로운 삶
성벽은 본래 무언가를 지키고 외부를 배척하기 위해 세워진다. 하지만 600년의 풍파를 견뎌낸 해미읍성의 성벽은 이제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장 너머의 팍팍한 삶에 지친 현대인들을 묵묵히 품어 안으며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농악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서산의 붉은 노을이 성벽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땀 흘린 풍물패도, 박수 치던 시민들도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담담한 발걸음으로 진남문을 다시 나서는 길, 등 뒤로 든든한 성벽이 나를 배웅하는 듯했다.
수많은 인연과 사연이 교차하는 이 너른 품 안에서, 다음에는 또 어떤 삶의 이야기가 피어날까. 계절이 바뀌어 성벽이 단풍으로 물들 때쯤,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아 읍성이 들려주는 조용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참이다.

▲ 해미읍성 성밖의 모습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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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 수놓은 상모돌리기, 옛 성곽이 품은 따뜻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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