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성기호 교사가 재직했던 수영고등학교(현 부산동여자고등학교)의 경력증명서. 이 서류에 따르면, 보안사가 연행했다는 수사기록에 앞서 이미 수일 전에 성 교사가 직위해제 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변상철
뒤틀린 사법 정의
고문과 조작으로 얼룩진 조서는 검찰을 거쳐 법원으로 넘어갔다. 군사정권 치하의 사법부는 피고인의 신체적 자유와 절차적 기본권을 지켜주는 방파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불법과 폭력의 산물을 합법으로 둔갑시키는 승인 기구로 전락해 있었다.
1972년 9월 13일, 서울형사지방법원 제7부(72고합357)는 피고인 성기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1년 6월 및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성기호 교사는 굴복하지 않았고 옥중에서 직접 항소이유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다.
"피고인은 1972. 2. 22. 부산에서 보안사 직원에 의하여 구속영장 없이 구속의 사유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체포되고, 다음날인 2. 23. 서울로 압송되어 동년 3. 27. 서울구치소로 이송 수감되는 동안 장기 불법구금(33일간) 되어 있었습니다. 수사관들의 혹독한 고문과 강요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72노1345) 역시 진실에 눈을 감았다. 1973년 1월 23일, 서울고법은 1심 판결을 파기하면서도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유죄 판결을 유지했다. 감옥 문을 열어주는 척 생색냈을 뿐, 간첩 조작 사건의 유죄 굴레는 그대로 씌워놓은 비겁한 타협이었다. 성 교사는 대법원에 상고(73도355)했으나, 1973년 4월 24일 대법원은 심리불속행과 다름없이 상고를 기각했다.
유죄가 확정되던 바로 그날인 1973년 4월 24일, 부산시 교육감은 성기호 교사를 교단에서 전격 면직(파면) 처리했다. 역사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던 교육자 인생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박탈당했다.
간첩죄라는 낙인은 한 개인의 직업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온 가족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저주였다.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성기호 교사는 더 이상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취업은 원천 차단되었고, 경찰과 정보기관의 상시적인 사찰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웃과 친척들은 '빨갱이 집안'이라며 등을 돌렸고, 가족들은 사회적 연좌제의 공포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다. 가장의 날개는 꺾였고, 생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극심한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 그리고 억울함으로 인한 화병은 성 교사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결국 성 교사는 억울한 고통의 나날을 지새우다, 끝내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4년 9월 13일, 향년 56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성 교사의 죽음으로 아들 성씨와 아내 노씨 등 남겨진 유가족은 가슴에 피멍이 들고 말았다. 아버지가 겪었던 고초, 그로 인해 풍비박산 난 집안의 상처는 수십 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낙인이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은 진실을 향한 마음
재심의 문을 두드렸던 아들 성씨는 재심을 시작하며 변호인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고 명예를 되찾아 드리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고 성기호씨 재심을 담당했던 최정규·박민서 변호사는 과거 수사, 재판 기록, 당시의 법원 판결문, 부산수영고의 인사 기록, 그리고 성 교사가 옥중에서 남긴 친필 항소이유서와 어머니 노화자씨의 진술서를 한 글자 한 글자 대조하며 재심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그 재심의 결정적 퍼즐은 ▲ 첫째, 보안사 수사보고서상의 '1972년 3월 22일 15:30 부산 임의동행' 기록 자체가 물리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점 ▲ 둘째, 설령 보안사 주장대로 3월 22일 임의동행했다 하더라도, 구속영장이 집행된 3월 27일까지 최소 5일간 영장 없는 불법 구금이 명백하다는 점 ▲ 셋째, 부산동여고 경력증명서상 직위해제 일자가 '1972년 3월 17일'로 기재되어 있어, 보안사가 주장하는 동행 일자(3월 22일)보다 앞서 이미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는 점 ▲ 넷째, 피고인의 일관된 진술대로 1972년 2월 22일부터 3월 27일까지 장장 33일 동안 영장 없이 불법 체포·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는 점 등이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이 형법 제124조(불법체포·감금죄)라는 중대한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증거 앞에 사법부 역시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하지는 못했다. 검찰조차도 "수사기록상 최소 5일간의 불법 구금이 인정되므로 재심 청구를 인용함이 타당하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할 정도로 이 사건의 불법성은 너무나도 확연했다.
서울고등법원 제7형사부는 2026년 5월 14일, 피고인 성기호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재심 개시 결정문에서 이미 수사기관의 위법성을 조목조목 질타했다.
"피고인이 1972. 3. 22. 15:30경 부산에 있는 주거지에서 육군보안사령부에 동행하여 같은 날 2회의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였다는 것은 경험칙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피고인이 1972. 3. 17. 직위해제 되었다는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1972. 3. 22. 이전에 이미 육군보안사령부에 불법구금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감금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재판부는 헌법상 적법절차의 원칙과 신체의 자유를 상기시키며,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피의자를 구금한 것은 형법 제124조의 불법체포·감금죄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및 제422조의 재심사유가 존재한다고 명시했다.
무죄판결의 의미

▲ 고 성기호 교사의 재심 무죄를 축하하기 위해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에서 준비한 꽃다발
변상철
재심 개시 결정 이후 열린 본안 재판에서 재심 재판부의 판단은 망설임이 없었다. 2026년 6월 11일, 재심 재판부는 고 성기호 교사에게 마침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무죄 이유로 밝힌 법리는 헌법적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위법수집증거 배제 법칙'이었다.
수사기관이 적법한 영장 없이 피의자를 33일간 불법 체포·감금한 상태에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 자필 진술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파생된 일체의 진술 증거들은 적법절차를 근본적으로 유린하여 수집된 증거다. 따라서 실체적 진실 여부를 떠나 법정에 증거로 제출될 자격(증거능력) 자체가 완전히 박탈된다.
검찰이 과거 유죄의 근거로 내세웠던 모든 증거가 증거능력을 상실하자, 피고인 성기호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유효한 증거는 법정에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원곡의 박민서 변호사는 이날 판결 선고 직후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성기호 교사 사건은 1970년대 군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평범한 교육자를 어떻게 공안의 제물로 삼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국가범죄였습니다. 54년 만의 무죄 판결은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조작 증거는 결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상식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제 국가는 망인과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부당하게 박탈당했던 교원 지위와 명예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실질적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함께 기소되었던 십 수 명의 재심 역시 검찰에서 직접 나서 밝혀야 하는 의무가 더해졌음이 명백합니다."
1972년 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정에서 도살장과도 같은 보안사 취조실로 끌려갔던 34세의 젊은 역사 교사 성기호. 반세기가 지난 2026년 여름의 끝에서 사법부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간첩'의 명부에서 지우고 '무죄'라는 정의를 다시금 새겼다.
그러나 5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고, 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사후적 명예 회복이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의 국가범죄를 끝까지 추적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국가 폭력 피해 사건들에 대한 진실 확인 작업은 우리 사법부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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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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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만에 무죄 받은 선생님, 치러야 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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