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 딸을 위해 남편이 직접 구웠던 동요 CD. 친구들은 입시 고민을 할 때 우리는 동요를 들었다. 또래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시간표를 살고 있던 우리 집의 흔적이다.
정현주
시계를 잠시 90년대로 돌려 본다. 대학 때부터 붙어 다닌 우리는 삼총사였다. 한두 해 차이로 결혼을 하고, 한두 해 차이로 배가 불렀고, 차례로 첫아이를 낳았다. 한 친구는 외동아들을 낳았고, 다른 친구는 연년생 딸을 낳았다. 그리고 나는 아들을 낳은 지 13년 만에 딸을 낳았다.
"우리 그동안 고생했잖아. 이제부터는 자주 만나자. 여행도 다니고!"
한창 육아에 바쁠 때는 여름·겨울 방학에나 간신히 얼굴을 보던 친구들의 모임에 부릉부릉 시동이 걸렸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성인 티를 팍팍 내는 순간부터였다. 분기 결산도 아닌데 3·6·9·12월 모임으로 바뀌더니, 어느새 매달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대화도 달라졌다. 사춘기 아이 뒷담화(!)와 입시 한숨이 빠져나간 자리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십 대 중반이 되자 한 친구는 노화를 좀 잡아보겠다고 성형외과와 피부과 단골이 되었고, 다른 친구는 파리바게뜨 창업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한식조리사 학원에 등록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둘째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달리고 있었다. 늦게 만난 아이에게 세상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에서 상어와 가오리 실물을 영접했고,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기린과 눈을 맞추며 박수를 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동네 엄마들과 팀을 짜서 숲 체험을 다녔고, 주말이면 승무원이 되고 파티시에가 되는 딸의 매니저가 되었다. 한 번 집을 나서면 2만 보는 우스웠고, 3만 보가 평균이었다.
어느새 우리 대화에는 퇴직과 노후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달리던 일상에 슬슬 브레이크를 걸 때, 우리 부부는 한창 자라는 아이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대신 집에서는 '노는 게 제일 좋아'를 외치며 뽀로로와 춤을 추었다.
친구들은 심심하다며 심심찮게 번개까지 치는데, 나는 출근하랴, 늦둥이 따라다니랴, 시간이 없었다. 연락할 때마다 키즈카페나 학원 앞에서 대기 중이라는 나를 불쌍하다며 놀리기도 했다. 그렇게 삼총사와 나는 한 걸음, 두 걸음씩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한낮이었다.
"어디니? 또 막내 학원 앞이니?"
"지금 집이야. 밀린 집안일 하고 있다. 오랜만이다. 얘."
"그냥... 목소리 까먹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친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한때 압구정 오렌지족이었던 남편이 조기 퇴직 후 베란다 장독에 막걸리를 담그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는 그걸 맛보다가 알딸딸해졌단다. 친구가 그간의 이야기를 꺼내자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들은 독립했고, 남편과 하루 종일 둘이 지낸다고 했다. 아이를 키울 때는 매일 새로운 뉴스가 있었는데, 이제는 9시 뉴스를 보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그러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속마음을 꺼내놓았다.
"너 늦둥이 낳기 잘한 거 같아. 넌 늙지 않는 거 같아. 아이도 어리지만, 아이 친구 엄마들도 다 젊으니 다시 젊은 시절로 가잖아. 세월을 거꾸로 가는 거지. 기집애야. 부럽다 얘. 시간이나 내. 밥이나 한번 먹자."'
그 뒤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에는 벌써 며느리와 사위를 맞은 친구들이 있고, 지난해에는 손자를 본 이도 생겼다. 단톡방에 아기 사진이 올라오고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손주 자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대학 입시를 이야기한다.
나도 친구가 부러웠다

▲벤자민 버튼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한 장면. 벤자민은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진다.
㈜일레븐엔터테인먼트
지난 주말, 스터디카페에서 늦는 딸을 기다리며 OTT를 넘기다가 오래전에 본 영화 한 편을 다시 틀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년에는 기막힌 설정과 잘생긴 브래드 피트에 빠져서 봤는데, 이번에는 문장 하나가 귀에 걸렸다. 영화가 시작된 지 19분쯤 지났을 때다. 노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잠자리에서 엄마 퀴니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벤자민 : 내가 점점 변해가는 것 같아.
퀴니 : 딴 사람들도 다 변해. 넌 좀 다르지만. 삶의 종착역은 다 같아. 어떤 길로 가는지가 다를 뿐이지.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이 장면을 보는데 문득 막걸리에 알딸딸해져 전화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겹쳤다. 친구들과 같은 나이를 먹었지만, 같은 시간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길을 걸었을 뿐. 내 시간도 멈춰 있던 것은 아니다. 언제 키우나 싶던 그 꼬맹이는 어느새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고, 내 책장에서 책을 골라 빌려간다.
지금 기쁘면서도 별별 계산을 하고 있을 늦깎이 임산부들이 떠오른다. 나 역시 아이가 대학에 갈 때 내가 몇 살인지부터 계산했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을 살아보니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둘째를 낳은 내게 노산의 베네핏은 '리턴'이었다. 몸의 시계는 꼬박꼬박 앞으로 가는데, 생활의 시간은 한 시절 뒤로 돌아갔다. 또래 친구들이 자녀의 독립을 이야기할 때 나는 다시 놀이동산을 갔고, 동물원을 걸었고, 지금은 스터디카페에서 늦는 딸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벤자민 버튼처럼 젊어진 것은 아니다.
첫아이를 늦게 만난 엄마라면 '다시'가 아니라 '조금 늦게'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또래와는 조금 다른 시간표를 살게 된다. 그래서 노산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친구들이 환갑을 앞두고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수험생 엄마로서 기도하는 시간도 의외로 재미있다고.

▲ 몸의 시계는 꼬박꼬박 앞으로 가는데, 생활의 시간은 한 시절 뒤로 돌아갔다.
retepwal on Unsplash
살짝 고백하자면, 그날 친구만 나를 부러워한 건 아니었다. 나도 친구가 부러웠다. 주말이면 밀린 집안일과 아이 주말 스케줄에 정신이 없는데, 낮술에 얼큰한 친구의 여유가 꿈같았다. 우리는 같은 나이를 먹으며 서로에게 없는 시간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조금 숨을 돌리면 만나야겠다. 나도 부러웠다고 꼭 말해줘야지. 기왕이면 낮술도 함께라면 더 좋고.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9
20여년간 공중파 방송작가로 활동했습니다. 10년간 광고홍보 프로덕션을 운영했습니다. 현재는 브런치 크리에이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국무총리 대상 수상
공유하기
친구들 환갑여행 갈 때, 기도하는 수험생 엄마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