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시민과 대화하는 순례팀 길을 걷다가 만난 시민들와 걷는 이유에 대해 알리기 위해 대화를 하는 순례단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촛불만 켜고 살자는 것이 아니다
청명씨는 자신이 순례를 시작한 이유를 에너지 소비와 삶의 방식에서 찾았다. 더 편리하게 살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생산과 소비를 끝없이 늘리는 사회구조가 기후위기와 핵위기, 경제위기와 전쟁위기를 불러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정하니씨는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며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 욕망 역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생산하고 더 소비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개인에게만 절약을 요구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탈핵은 전기를 쓰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버리고 촛불만 켜고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의 말처럼 기후위기를 막으면서 동시에 안전한 에너지를 사용하자는 요구다. 핵발전과 소형모듈원자로에 투입할 재원을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개선, 에너지 효율 향상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얼마나 생산하고 소비할 것인지, 시설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 그 과정에서 주민의 결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지역의 희생을 전제로 한 에너지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발전원의 이름만 바꾼다면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될 수 있다.
박춘성씨는 핵발전이 지속 가능할 수 없는 이유로 핵폐기물을 들었다. 지금 생산한 전기를 사용하는 시간은 짧지만, 고준위핵폐기물은 수만 년 동안 관리해야 한다. 현재의 경제성 계산에는 미래 세대가 감당할 관리비용과 사고 위험이 제대로 포함돼 있지 않다. 현재 세대가 편리와 이익을 누리고 다음 세대에게 위험과 책임을 넘기는 계산이다.
끝나지 않았는데 '끝'이라고 쓰는 정부
순례단이 걷던 9월 6일, 한국수력원자력은 시운전 중인 새울 3호기를 수동 정지했다고 밝혔다. 터빈으로 공급되는 증기의 응축수를 배수하는 배관에서 누설이 확인됐다는 이유였다. 한수원은 상세 원인을 분석 중이며 방사선 영향은 없고 발전소는 안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한 뒤 보도자료를 "끝"이라는 글자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주민에게는 끝난 일이 아니다. 왜 누설이 발생했는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지, 시운전 과정과 안전점검이 충분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이제 시작돼야 한다. 더구나 핵발전소의 가동을 모두 멈춘 뒤에도 사용후핵연료를 수만 년 동안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핵발전에서 '끝'은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부는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산업의 전력수요를 이유로 신규 핵발전소와 소형모듈원자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산업계가 요구하는 전력을 그대로 확정수요로 받아들이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더 짓는다면 위험은 다시 지역으로 향한다.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과 발전소·송전탑·핵폐기물을 떠안는 곳이 달라지는 구조도 그대로 남는다.
네 갈래 마음이 청와대로 간다
광화문탈핵목요행동 참가자들은 피켓을 들고 같은 자리를 지켰다. 세종 순례단은 무관심과 환대, 조롱과 응원을 함께 만나며 오산까지 걸었다. 서로 있는 곳과 행동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두 길을 움직인 마음은 같았다.
나와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누구도 오래 안전할 수 없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의 위험과 송전탑 아래 농민의 고통, 일터에서 젠더폭력을 마주하는 노동자의 두려움, 기후재난 앞에서 가장 먼저 삶터를 잃는 사람들의 처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면 안전과 행복도 함께 지켜야 한다.

▲길을 걷다 잠시 쉬는 순례단 천안을 향해 걷는 도중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순례단
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
9월 16일, 고리와 울진, 영광과 세종에서 출발한 네 갈래 길이 청와대 앞에서 만난다. 그날 청와대로 향하는 것은 순례단의 발걸음만이 아니다. 1년 넘게 광화문에서 피켓을 들어온 사람들의 시간, 성당 문을 열어준 사람들의 환대, 점심값을 두 번 건넨 신자의 마음, 무관심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순례자의 다짐도 함께 간다.
한 사람의 걸음은 작다. 피켓 한 장도 가볍다. 그러나 누군가 지치면 다른 사람이 피켓을 들고, 누군가 멈추면 다른 사람이 그 길을 이어 걷는다. 지키려는 마음은 그렇게 연대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여 청와대로 간다.
글쓴이: 최경숙 환경운동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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