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1969) 여의도 제방이 쌓인 모습, 활주로, 농가 등이 보인다. 북쪽으로 넓은 백사장이 선명하고, 마포나루와 강폭이 무척 좁다. 밤섬의 윤곽도 아직 남아 있다. 서울교는 연결되어 있고, 공사 중인 서울대교(마포대교)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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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평 비옥한 농지는 여느 평화로운 시골을 연상시켰다. 빠질 각오를 한다면 언제건 건너다닐 수 있던 섬을 에둘러, 제방을 쌓았다. 높이 16m, 넓이 21m, 길이 7.6km의 윤중제다. 이로써 2.9㎢(87.8만 평) 면적으로 여의도가 재탄생한다.
고운 모래가 연일 파여 나가 여의도가 채워질수록, 강은 넓고 깊어진다. 점차 사라져가는 밤섬, 주민들이 와우산 자락으로 이주당한다. 백사장 준설로 강폭은 1300여m로 넓어진다. 엄청난 공사였다. 발파 버튼을 누르고 110일 만에 변해버린 풍경에, 모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110일의 돌관공사
1966년 3월 건설부에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한강 유역 수자원개발 조사를 위한 '한미합동조사위원회'가 꾸려진다. 1971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부족한 전력생산을 위한 댐과 수해 방지를 위한 치수, 농업용수 확보 등이 목적이다.
그해 7월 한강에 대규모 홍수가 밀어닥친다. 조사위원회는 항구적 수해 방지대책에 골몰한다. 7월 16일 대통령이 "강폭을 고르게 재조정하여 호안 시설을 새로 만들어 30m 폭의 도로를 닦고 여의도 부근 등 폭이 넓은 지역은 백사장을 매축하여 주택지구를 조성, 한강이 수도 서울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한강건설사업소(1968.02.24) 한강건설사업소에서 서울시청 간부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시장의 모습이 보인다. 벽에는 '여의도 개발계획, 서울대교(마포대교), 강변도로 건설' 등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충직한 서울시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1967년 11월, 여의도에 윤중제를 둘러 신도시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한강개발3개년계획'의 후속이다. 12월 기공식이 열리고, 재원 조달계획과 서울공항으로 비행장 이전 협의가 완료된다. 이듬해 1월 '한강건설사업소'가 출범한다.
당시 우리 토목 기술은 후진적이었다. 인력 의존도가 높고, 특히 기계와 장비가 무척 열악했다. 7.6km의 제방과 2.9㎢라는 광대한 매립지는 엄청난 토목 공사를 필요로 했다.
일본에서 흙 운반용 트럭 50여 대를 들여온다. 수많은 장비와 연인원 52만 명의 노동자가 8시간 3교대로 24시간 작업을 강행한다. 제방 호안을 감쌀 석축과 콘크리트블록이 부교를 통해 쉼 없이 한강을 건너간다.

▲밤섬(1968.02.10) 폭파 직전의 밤섬 모습. 농경지와 언덕 위로 집들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밤섬을 폭파해 여의도 매립에 사용한 바위와 흙은 매립량의 3.3%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웠다던 밤섬을 왜 폭파했을까?
김현옥 시장은 1968년 4월부터 한강에 콘센트 막사를 설치, 현장에서 시장 업무를 봤다. 철제 침대에서 잠자며, 현장 지휘 감독을 시정의 제일로 삼았다. 대통령도 수시로 현장에 출몰했다.

▲윤중제 준공식(1968.06.01) 지금의 마포대교 남단 여의도에서 열린 윤중제(여의동로) 준공식 장면. 대리석이 깔린 자리로 '漢江開發(한강개발)'을 새긴 네모난 대리석을 박아, 제방 마지막 블럭이라는 의미를 붙였다. 당시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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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개발기념비 준공식에 사용된 대리석과 똑 같은 글(漢江開發), 옆으로 검은 돌에 윤중제 개발 내용을 적었다. 당시 서울시장이 1968년 9월 30일 제막한 기념비다. 어딘가로 사라진 걸 샛강 인근에서 발견, 이곳 마포대교 남단 윤중제 준공식 장소 인근으로 옮겨 놓았다. 검은 비석에 각인된 당시 대통령 이름을 시민들이 쪼아 놓았다.
이영천
그렇게 110여 일이 지나갔다. 그해 6월 1일 대통령 부부가 '漢江建設(한강건설)'이라는 제방 머릿돌을 끼워 넣음으로써 윤중제가 준공된다. 불철주야 그야말로 광기의 질주였다.
땅을 팔아야
이제 토지이용계획이 관건이다.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조성한 용지를 빨리 팔아야만 했다. 1963년 설립된 '한국종합개발공사'의 김수근 팀이, 보차(步車)가 분리된 입체 도시 모델을 제시(1969)한다. 서울과 인천을 연계할 미래도시 구상(안)이다.

▲김수근(1969)의 여의도 계획(안) 1969년에 계획된 여의도 도시계획(안). 지금과는 무척 다르다. 보행자는 육교 위로 다니고, 차량은 지상으로 다니는 '보차분리'로 계획되었다. 보차분리의 원류라는, 1958년에 개발을 시작한 프랑스 파리의 '라 데팡스'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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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마포 와우산에서 아파트가 무너져 내린다. 높은 산에, 최고 권력자의 시선에 잘 보이도록 지은 시민아파트다. 그 바람에 불도저 시장이 옷을 벗어야 했다. 서울대교(마포대교)가 완성되어 갈 무렵으로 여의도는 한창 매립 중이다.
여파로 여의도 개발구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당시 서울시는 명동공원, 서린공원 등 도심지 땅을 팔아야 할 정도로 재정난에 허덕였다. 건축가 김수근의 구상은 재정난 해소에 그다지 부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1970년 9월, 대통령이 비상시 군사용 공항으로 활용할 대광장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수근 구상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했다. 도시계획가 박병주 교수에게 계획(안) 수립이 맡겨진다. 김수근 구상의 골격은 지키되, 입체계획을 평면계획으로 전환한다. 주간 18만 인의 활동 인구, 야간 4만 인의 거주인구를 상정한다.

▲여의도(2020) 박병주의 계획에 따라 성장해 온 2020년의 여의도. 3D로 단순화 하였다. 이후에도 일부 고층 빌딩이 더 들어섰다. 공원우로 변한 광장, 둔치와 3개의 교량이 보인다. 왼쪽 서강대교 아래 밤섬 자리의 모래톱도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50m, 35m, 24m, 20m의 격자형 간선가로가 구획한 19개 블록에 주거와 상업으로 기능을 배분한다. 2년 가까이 기반시설 공사가 진행된다. 지하에는 상하수도, 전기, 통신, 가스관 등이 지나갈 길이 6km의 공동구가 설치된다.
1971년 국군의날 행사에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사시 전투기 이착륙이 가능한, 아스콘 포장의 1,350m×280∼315m(12만 평)의 직사각형이다. 군사 정변 날짜로 '5·16 광장'이라 불렀다.
87.8만 평 중 54만 평이 매각 가능한 땅이다. 시범아파트의 탄생 배경이다. 박병주가 계획한 고급 주거단지로 처음엔 시들했다. 공무원에게 일부 분양된다. 1971년 10월 아파트 준공식에 파격적으로 대통령이 참석한다. 서울시장 이하 공무원들이 아파트 판매에 나서는 격세지감 광경이 연출된다. 여의도 매립은 1973년에 마무리된다.
서울의 맨해튼
서울대교 완성(1970.05)과 버스노선 조정, 공무원 입주로 생활 여건이 점차 개선된다. 그러자 시범아파트 인기가 크게 올라간다. 1972년 기준, 30억 원이라는 막대한 개발이익을 서울시가 거둔다. 1974년엔 한양, 삼익, 라이프, 삼부 등 민간 아파트가 붐을 이룬다.

▲여의도(2020) 여의도 동쪽 원효대교 쪽에서 바라본 2020년 2월의 여의도.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다. 가히 '서울의 맨해튼'이라 할만 하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1975년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KBS 등 방송국, 증권거래소, 전경련 등이 옮겨 오면서 여의도는 그야말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날 기반을 다진다. 1982년 1만 그루 벚나무를 심는다. 창경궁 제모습찾기 사업 과정에서 일제가 심은 벚나무 일부도, 이때 여의도로 옮겨 심어진다.
1968년 폭발은 바위섬 하나 없애자는 게 아니었다. 한강 규격화의 서막이자, 공간구조 재편의 신호탄이었으며,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분출하는 욕망이었다. 그때 사라진 밤섬과 백사장이 '조국 근대화'로 포장되었다.
권력이 쌓은 제방이다. 과정도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임기응변에 즉흥적 계획, 행정력이 과도하게 개입했다. 여의도는 더는 물에 잠기는 양말산이 아니었다. 그렇게 88만여 평의 인공섬이 생겼다. 개발이익도 남겼다. 매립지를 팔아 개발 재원으로 삼겠다는 명분을 충족시켰다.
독재 권력의 손짓에 기간(基幹)시설과 민간기업이 섬으로 옮겨갔다. 자본과 권력, 언론이 응집했다. 시민의 여망도 세찼다. 그에 따라 화려한 도시로 변모하였다. 서울의 '맨해튼'이다.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둔치(여의도한강공원)가 덧대어지고 강은 더 깊게 파였다. 1968년의 제방은 여의동로와 여의서로로, 광장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더욱 치솟는 스카이라인의 여의도는, 지금도 변신 중이다.

▲마포대교와 밤섬(2020) 옛 마포나루 쪽에서 하늘에서 본 마포대교와 한강, 그리고 여의도. 오른쪽 강 한가운데, 밤섬이 있던 자리에서 자라나는 푸른 섬같은 모래톱이 보인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라진 밤섬과 백사장을 여의도가 대신하고 있을까? 짙푸른 한강은 왁자지껄하던 마포나루를 기억하고 있을까? 밤섬이 사라진 자리에 푸른 모래톱이 자라나고 있다. 사라진 섬의 소리 없는 항변이다. 결국 여의도를 메워낸 흙과 모래도 한강의 것이었다. 그렇게 위안 삼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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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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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맨해튼'... 대통령 지시로 시작된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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