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적 인간 -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 문하연(지은이)
동아엠앤비
우선 제목이 끌렸다. 무엇보다 작가의 말에 "이 글이 계엄이 선포된 흉흉한 시기에 한가한 미술관 이야기가 가당키나 한가? 싶어 위축되고, 혼란한 세상과 동떨어진 체 미술관 투어를 다니는 게 스스로 못마땅하게 느껴져서 괴로웠다"는 문장에 마음이 멈췄다.
그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 또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가하게 미술관 책이 웬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쓰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은 굴려 가야 하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딱 내 심정이었다. <미술적 인간>은 '부소 갤러리'에서 시작된다. 이 여정의 파트너는 82세 아버지.
"막내딸. 여긴 비가 하염없이 와. 비가 하염없이 오니까 마음이 울적하네. 회신요망."
귀여운 회신 압박 문자를 보내는 아버지의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저자는 부녀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부소 갤러리로 향한다. 평소 미술관에 가보지 않았고 또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닌 수채화 동호회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어서 잠시 돌아볼 요량이었지만, 의외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돌아보다가 한 작품 앞에서 계속 머무른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엔 다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거든."
아버지의 그 말 앞에서 왜 이 책의 제목이 <미술적 인간>인지를 혼자 깨달았다. 그 순간, 괜히 끌렸던 작품들이 생각났다. 내겐 방황하던 시기, 혼자 훌쩍 떠난 동유럽 여행에서 만난 에곤 실레의 작품이 그랬다. 그 당시 에곤 실레를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끌렸다. 인간의 표정과 모습이 고통스럽게 보였고, 왠지 모를 외로움이 공감되서 전시실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한참을 머물렀더랬다.
'미술적 인간이란 결국, 타인의 고통과 지나간 시간에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한 책 속의 문장처럼 결국 예술도 인간의 일이고, 무슨 뜻인지 잘 몰라도 작품 앞에서 왠지 나(너) 같고, 내(네) 이야기 같고, 내(우리의) 처지 같은 느낌이 들며 감응하면 그게 바로 미술적 인간 아닌가.
그 다음 나를 이끈 건 '석파정 서울미술관'이다. 김기창, 김환기, 장욱진 등 대체로 유명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유영국의 작품 옆에 쓰여진 이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60세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자연으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유영국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대가다. 그런 화가가 60세까지 기초를 좀 해보려고 했다니. 이제 60을 앞두고 대가는커녕 밥 벌어 먹고 사는 것으로도 허둥거리는 나를 스스로 못마땅해하던 차였기에 더 그 말이 충격적이었다.
사실 책을 세 권 썼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첫 책인 <혼자 살면 어때요 좋으면 그만이지>를 낼 때에는 책만 내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두 번째 책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까지 쓰고야 깨달았다. 희망이 다 빠져나가는 와중에, 남은 의욕을 탈탈 털어서 쓴 글들은 출판사에서 두 번이나 까였다. 간신히 세 번째 책 <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를 출간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고, 완전히 절망해서 글쓰는 작업에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60세까지 기초를 좀 해보려 했다니. 책 속에서 유영국 선생이 튀어나와서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딱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림이 안 팔리는 시대를 살았기에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었고 재료가 넉넉하지 않아 많이 그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오르기까지 기다린 그의 우직함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화가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난 카라바조다. 그의 작품 <성 토마스의 의심>이나 <그리스도의 체포>,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나같은 문외한도 몇 번 봤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독창성이 뛰어났는데, 불행하게도 성품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시비가 붙었고, 싸우다가 상대에게 큰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고, 그러다 감옥에 갇히고, 도망가고, 또 그림으로 각광을 받아 사면되고, 그러다가 사고를 치는 일을 반복했다. 그야말로 자기 버릇 개 못 주는 삶을 산 것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그가 그동안 잘못 산 자신의 목을 잘라 용서를 구하는 것같은 이중 자화상으로 해석하는데, 결국 그는 이 작품을 들고 자신을 사면해 준 로마로 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젊은 날의 자신을 죽인 그가 로마로 갔으면 이번엔 개과천선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면해 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는 한 아마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나를 비롯해서 '성찰'이 사라진 우리 정치 상황과 비슷해서 강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미술관에 대한 애정 어린 글
이렇듯 미술관은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도 답을 하면서 마음에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추천사에 있는 구정순 구하우스 미술관 관장의 말처럼 저자는 단순히 미술관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삶의 파고를 견뎌낸 인간의 온기와 선함, 그리고 상실의 흔적을 짚어낸다."
단순히 미술관과 작품을 소개하는 게 아니어서, 어느 대목에선 '현웃'이 터지고,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또 어느 문장 앞에서는 그 문장을 안고 울고 싶을 정도의 위로도 있다. 그래서인지 분명 애써 찾아낸 미술관에 대한 애정 어린 글을 전하는데, 내 마음을 발견하고 읽어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속이 답답하고 외로워서 숨차게 엉금엉금 걷고 있던 나를, 이 책이 잠시나마 내 짐을 받아주고 수고했다며 안아주는 것 같았달까.
그러니 요즘 나처럼 사는 게 영 시원찮고, 바바리 코트 하나 걸치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라면 <미술적 인간>을 한번 펼쳐보시길. 미술을 잘 몰라도 괜찮다. 그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삶이 보이고,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 덕분에 나도 한동안 잃어버렸던 숨구멍 하나를 찾았다.
미술적 인간 -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
문하연 (지은이),
동아엠앤비, 2026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공황증 재발 직전, 회사 동료가 추천해 준 장소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