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별로' 말고 내 감정의 말은 어디로 갔을까

<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을 읽고, 형용사와 부사를 다시 보게 됐다

등록 2026.10.01 17:49수정 2026.10.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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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내가 자주 쓰는 감정 표현을 떠올려 봤다. "좋다", "괜찮다", "별로다", "짜증난다". 생각보다 몇 개 되지 않았다. 메신저에서는 더 단순해진다. "ㅋㅋ", "헐" 하트, 엄지손가락 이모티콘으로 웬만한 감정을 대신한다. 뜻은 통한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가끔은 이 편리함이 마음을 너무 빨리 정리해 버리는 건 아닐까 싶다. 서운한데 그냥 "별로"라고 하고, 반가운데 "좋네"라고 하고, 벅찬데도 하트 하나 보내고 끝낸다. 감정이 단순해서 쓰는 말이 적은 걸까. 아니면 쓰는 말이 줄어서 서로 다른 감정을 비슷한 것으로 넘기고 있는 걸까.


 <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 표지
▲ <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 표지 최미향

김경집의 <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저자는 1년 동안 국어사전을 읽으며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말들을 살폈다. 특히 형용사와 부사에 오래 머문다. 학교에서는 대개 '꾸며주는 말'이라고 배웠던 품사들이다.

'꾸며주는 말'이 정말 꾸밈에 불과할까

"꽃이 핀다"와 "붉은 꽃이 천천히 핀다"는 같은 뜻을 전달하지만 같은 장면은 아니다. 뒤의 문장에는 색이 있고 속도가 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뿐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일어나는지도 보인다.

감정도 그렇다. '좋다'라는 말 안에는 반갑다, 흐뭇하다, 뿌듯하다, 벅차다 같은 여러 마음이 들어 있다. 오랜 친구를 만나서 좋은 것과 자녀가 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 좋은 것, 오래 준비한 일을 끝내고 좋은 것은 분명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차이를 자주 한 단어로 접어버린다.

저자는 언어가 섬세해지면 감각과 생각도 섬세해질 수 있다고 본다. 처음에는 이 말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았다. 단어를 많이 안다고 생각이 깊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그래도 내 말버릇을 떠올리니 쉽게 지나칠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종종 "기분이 별로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분이 서운한 건지, 억울한 건지, 허탈한 건지, 쓸쓸한 건지는 잘 따져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말하기는 편하다. 대신 내 마음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들여다보는 일도 함께 건너뛴다.

말을 많이 안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적어도 내가 느끼는 차이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형용사와 부사가 문장을 꾸미는 말이라기보다 차이를 알아보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콘텐츠 이야기보다 오래 남은 것

책은 여기서 K-콘텐츠로 시선을 넓힌다. 저자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음악이 세계에서 호응을 얻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우리말에 쌓인 감정과 감각의 표현을 본다. 인물의 심리나 관계의 미묘한 거리, 장면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언어가 중요한 재료가 된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읽었다. K-콘텐츠의 성공을 우리말의 풍부함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가 얽혀 있다. 제작 환경도 있고, 플랫폼도 있고, 연출과 연기도 있다.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저자의 이야기를 전부 밀어낼 필요는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오래 기억되는 장면을 떠올리면 대사와 표정, 사람 사이의 미묘한 온도가 함께 남는다. 그런 온도를 표현할 말을 오래 쌓아온 언어라면 창작자에게 하나의 재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한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점점 적은 말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적은 말로도 통하지만, 놓치는 감정은 없을까

메신저는 빠르고 편하다. '좋아요' 하나면 동의도 하고, 응원도 하고, 호감도 보일 수 있다. 이모티콘 하나로 민망함과 미안함을 함께 넘길 수도 있다. 이런 표현을 두고 언어가 퇴보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 역시 지금 시대가 만들어 낸 소통 방식이다.

다만 편리한 표현 하나가 여러 감정을 대신하는 일이 반복되면 어떤 말은 점점 낯설어질 수 있다. 낯선 말은 쓰지 않게 되고, 쓰지 않는 말은 더 낯설어진다. 사전에 남아 있다고 해서 그 말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다 말고 '좋다'라는 말을 쓰려 하다 아주 잠깐 멈추는 일이 생겼다. 정말 좋은 건지, 반가운 건지, 흐뭇한 건지, 벅찬 건지 생각해 본다.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내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게 한다.

<빛깔과 결을 담은 우리말>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자랑하는 데서 끝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잘 쓰지 않게 된 말을 다시 꺼내보고, 마음에 드는 말이 있다면 직접 써보자고 권한다.

단어 하나를 더 안다고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제까지 "좋다" 하나로 지나쳤던 마음을 오늘은 조금 다르게 알아볼 수 있다면, 그 변화가 아주 작다고만 하기도 어렵다.

책을 덮고 다시 사전을 펼쳐보고 싶어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모르는 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놓치고 지나간 마음의 이름이 더 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빛깔과결을담은우리말 #김경집 #우리말 #한국어 #형용사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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