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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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
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 ⓒ권기봉 200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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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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