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JTBC에서 최규석 작가의 동명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송곳>이 방송됐다. <송곳>은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영화 <조선명탐정>을 연출했던 김석윤 감독이 사회 고발물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작품이다. 지현우가 육군사관학교 장교 출신으로 프랑스계 유통회사 '푸르미'의 과장 이수인을 연기했는데 최고시청률이 2.2%에 머물렀을 정도로 흥행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하지만 <송곳>은 낮은 시청률에 비해 온라인 화제성 지수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올랐다. 무엇보다 한국의 노동자 문제와 정규직/비정규직 직장인들의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특히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수인 과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푸르미의 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되는 과정이 지현우의 인상적인 연기와 함께 상당히 흥미롭게 전개됐다.

<송곳>은 한국의 노동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드라마였지만 이미 영화에서는 <송곳>이 방영되기 1년 전 비정규직과 해고노동자 문제를 다룬 상업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팬들에겐 메인보컬 D.O.의 연기 데뷔작으로도 유명했던 작품이다. 바로 2014년에 개봉해 노동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관객들에게 많은 울림을 줬던 염정아와 문정희, 고 김영애 배우, 천우희 주연의 영화 <카트>였다.
 
 <카트>는 할리우드 대작 <인터스텔라>와 맞붙는 바람에 아쉽게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실패했다.

<카트>는 할리우드 대작 <인터스텔라>와 맞붙는 바람에 아쉽게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실패했다. ⓒ (주)리틀빅픽쳐스

 
지천명에도 활발한 활동 이어가는 배우

지난 1991년 만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해 선에 뽑힌 염정아는 MBC 청춘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듬해 미스 인터내셔널 대회 출전을 위해 <우리들의 천국>에서 하차한 염정아는 미스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다(이는 2000년 손태영이 같은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기 전까지 한국 출전자의 최고 성적이었다). 

염정아는 1990년대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의 이미지가 강해 크게 주목 받진 못했다. 그렇게 예쁘기만 한 배우로 머무는 듯했던 염정아는 2003년 김지운 감독의 호러영화 <장화, 홍련>에서 아이들을 학대하는 기괴한 계모를 연기하면서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2004년에는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에서 '구로동 샤론스톤'으로 불리는 서인경 역을 통해 새로운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다.

염정아는 2000년대 중·후반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와 <소년, 천국에 가다> <오래된 정원>,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 <워킹맘> 등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입지를 넓혔다. 2011년에는 드라마 <로열 패밀리>에서 국내 굴지기업 JK의 둘째 며느리 김인숙 역을 맡아 열연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배우로서 자신만의 확실한 영역을 다지던 염정아는 2014년 규모가 작은 영화 <카트>에 출연하는 다소 '의외의 선택'을 했다.

염정아는 <카트>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엄마에서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해고통지를 받고 노조활동에 참여하는 워킹맘 선희를 연기했다. 염정아는 <카트>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연기상과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카트>는 전국 81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 했지만 염정아의 커리어에서 <카트>는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염정아는 2018년 영화 <완벽한 타인>에 출연했고 수많은 유행어를 남긴 화제의 드라마 < SKY캐슬 >에서 한서진 역을 맡아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염정아는 2022년 뮤지컬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23년에는 514만 관객을 동원한 류승완 감독의 <밀수>에서 해녀 엄진숙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집단 이기주의 아닌 '생존' 위한 파업
 
 <카트>의 주인공들은 집단 이기주의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아닌 생계를 위협 받는 우리 이웃들이었다.

<카트>의 주인공들은 집단 이기주의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아닌 생계를 위협 받는 우리 이웃들이었다. ⓒ (주)리틀빅픽쳐스

 
사실 노조활동이나 파업 등은 일반 시민들에겐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게 사실이다. 특히 철도나 버스, 지하철 등 시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업계의 파업은 시민들의 생활에 본의 아니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파업에 관련한 언론의 뉴스에서 노동자들의 입장보다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식이 많은 것도 노동운동이나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영화 <카트>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회사와의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라 부당하게 해고통지를 받은 우리 이웃들로 그려진다. 실제로 <카트>에서는 마트에서 번 돈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선희(염정아 분)를 비롯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혜미(문정희 분), 고령의 청소 노동자 순례(김영애 분), 88만원 세대 미진(천우희 분) 같은 서민들이 노조의 주축을 이룬다.

사실 마트가 주요배경인 영화에서는 기존 마트를 빌려 촬영하면 자연스럽게 마트홍보가 되면서 제작비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만행에 대한 투쟁을 소재로 한 <카트>에 대형마트들이 촬영협조를 해줄 리 만무했고 결국 제작진은 경기도 오산의 물류창고를 개조해 직접 마트로 꾸며 촬영했다. 다만 해고노동자들이 물대포를 맞아가며 카트를 끌고 마트로 돌진하는 결말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카트>는 노동자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고 있고 상업영화 쪽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부지영 감독이 연출했지만 염정아를 비롯해 문정희, 고 김영애 배우, 김강우 등 대중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다. 여기에 <카트>의 비밀병기(?)였던 도경수(엑소의 디오)와 떠오르는 신예 천우희 같은 젊은 배우들도 적절히 배치했다. 전태일 열사 44주기이자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에 맞춰 개봉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카트>는 함께 극장에 걸려 있는 상대를 간과했다. 당시 <카트>보다 1주일 먼저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극장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브래드 피트의 <퓨리>와 제니퍼 로렌스의 <헝거게임: 모킹제이>까지 개봉하면서 <카트>는 일찌감치 흥행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정치계와 노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단체관람이 이어졌지만 이미 꺾인 흥행세를 되돌리기엔 무리였다.

엑소 메인보컬의 연기 데뷔작
 
 엑소의 메인보컬 디오는 <카트> 출연을 계기로 '배우 도경수'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얻었다.

엑소의 메인보컬 디오는 <카트> 출연을 계기로 '배우 도경수'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얻었다. ⓒ (주)리틀빅픽쳐스

 
<카트>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재로 한 심각한 영화지만 극장에는 의외로 10대와 20대 여성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보이그룹 엑소의 멤버 디오로 잘 알려진 도경수가 선희의 아들 태영 역으로 연기자 데뷔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카트>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 무대인사 현장은 엑소팬들이 점령했고 영화 개봉시기에 열릴 예정이었던 VIP 시사회 포토월 행사는 팬들이 몰리면서 취소됐다.

팬들의 다소 과했던 응원과 별개로 도경수는 <카트>에서 태영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엑소를 잘 모르는 관객들은 뒤늦게 <카트>의 태영을 연기한 배우가 엑소멤버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카트> 출연 전까지 연기경험은커녕 연기수업조차 받아본 적이 없었던 도경수는 <카트>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상에 노미네이트됐고 곧바로 첫 지상파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캐스팅되며 본격적으로 배우겸업을 시작했다.

문정희는 <카트>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마트에서 일을 하며 6살 된 아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 혜미 역을 맡았다. 혜미는 파업 전까지 별다른 친분이 없었던 선희에게 먼저 다가가 '언니'라고 부르며 친해졌지만 파업 현장 천막에서 용역 깡패들의 기습에 아들이 다치는 것을 목격한 후 사측에 굴복하고 마트로 돌아갔다. 문정희는 <카트>에서의 열연을 통해 부일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011년 영화 <써니>에서 통칭 '본드걸'로 주목 받은 후 <우아한 거짓말> <한공주> 등에 출연한 천우희는 <카트>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원서를 넣은 회사 50곳에서 모두 불합격 통보를 받은 힘겨운 청년세대 미진을 연기했다. 미진은 영화초반 파업동참과 노조가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마트에서 만난 친구엄마에게 수모를 당하고 연이은 회사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 노조에 가입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카트 부지영감독 염정아 도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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