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총선 3주 뒤인 1948년 5월 31일 오전 10시, 서울 경복궁 광화문 안쪽의 중앙청 대홀에서 제1대 국회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자의 등단, 애국가 제창, 국기에 대한 경례 및 묵념, 의원 출석 보고, 국회 소집에 관한 브리핑에 뒤이어 임시의장 선출이 있었다. 최고령자인 이승만 의원이 후보로 추천되고 만장일치로 당선됐다.
 
국회사무처가 작성한 <국회 속기록 제1회 제1호>에 따르면, 연단에 오른 임시의장 이승만의 첫마디는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였다. 그런 다음 그는 평양 남산현교회 등에서 목사로 일했고 종로갑구에서 당선된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맡겼다.
 
일동기립 상태에서 이윤영은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시여"라는 첫마디로 시작한 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의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날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라고 말하며 기도를 이어갔다. 
 
임시의장 이승만의 첫마디와 이윤영의 기도로 어우러진 이 장면은 기독교 내의 극우세력이 이승만을 추종하는 동기 중 하나를 설명한다. 경복궁 옆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고 주미대사관 앞에 이승만동상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의 저변에는 이승만이 기독교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기독교 내 극우세력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집권기는 종교적 엄숙함과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대통령이 천사 같은 사람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이 시기가 깡패들의 전성시대였던 것은 공권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천사가 아닌 깡패들을 비호하고 이들을 앞세워 정권을 보위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집권기 후반의 실상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 MBC

 
4·19혁명 64주년인 지난 19일 방송된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제1회는 경기도 황천시 경찰인 박영한(이제훈 분)이 서울로 전근하는 장면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 썩은 정치 바로잡자"는 구호가 거리에서 울려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이승만 집권기 후반은 이윤영의 기도에 나오는 "악마"들에게 불리한 시기가 아니었다. 악마 같은 세력들이 못 살겠다며 아우성치는 시대가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 민주주의 억압, 장기독재 등으로 인해 천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절규를 하던 때였다.
 
오로지 경찰의 사명만 생각하는 순수 경찰 박영한은 시장에서 자릿세를 갈취하며 상인들을 괴롭히는 깡패를 불러다 놓고 거칠게 조사한다. 깡패가 "침 바르면 다 내 땅이지"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자, 박영한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깡패의 얼굴을 때리며 "이제 이거 내 땅이네"라며 놀려댄다.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 MBC

 
박영한이 "어디서 못된 것만 쳐배워가지고, 이런 순양아치 같은 새끼를 봤나"라고 쏘아대자, 근처에 있던 형사가 "어이! 박형, 박형!" 하며 성급히 달려온다. 그러면서 "이쪽 분들한테 말 함부로 하면 안돼"라고 주의를 준다.
 
이승만 정권 때는 경찰의 위세가 검찰보다 강했다. 검찰은 물론이고 군대보다도 정치적 위상이 높았다. 그런데 이런 경찰 말고, 또 다른 경찰이 이 시기를 주름잡았다. 나라에서 녹을 받는 대신, 시장 등지에서 '녹'을 뜯어내는 "이쪽 분들" 역시 이승만 집권기의 '실질적' 경찰이었다.
 
해방 직후의 미군정은 숫적 열세에 놓인 친일보수세력을 응원하고자 이북 출신 극우단체들을 지원하면서 이들을 앞세워 항일진보 진영을 탄압했다.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은 1948년 제주 4·3항쟁에도 투입돼 악명을 날렸다. 청년단체들의 폭력을 부추기는 미군정의 행태는 이승만 정권에 계승되고, 이는 '정치와 깡패의 제휴'라는 제1공화국의 특징을 규정하는 요인이 됐다.
 
이승만 정권이 깡패들을 얼마나 후원했는지는 정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일선 깡패들의 태도에서도 반영됐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경찰관들 앞에서도 위세를 부리는 깡패들이 적지 않았다.

'수사반장 1958'의 시대적 배경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 MBC

 
< 수사반장 1958 >의 시대적 배경인 1958년에도 그랬다. 그해 1월 15일 서울 창덕궁 주변에서는 깡패가 아무 이유도 없이 경찰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날뛰는 깡패, 순경도 구타'는 이영수라는 20세 된 깡패에 관해 이렇게 보도했다.
 
"이(李)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2명과 함께 13일 하오 6시 30분경 종로구 원남동 로타리에서 창덕궁지서 근무 이춘경(35) 순경을 무조건 구타하여 2주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처를 입힌 자라 한다."
 
깡패들의 등쌀에 경찰은 물론이고 헌병들도 몸조심을 해야 했다. 1959년에는 서울 동대문시장연합회에 소속된 정치깡패 이천일이 헌병을 위협한 일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해 3월 22일자 <조선일보> '헌병 때린 깡패'는 이천일에 관해 이렇게 전했다.
 
"21일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는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 사원 이천일(29)을 재물손괴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하였는데, 이(李)는 동대문 일대의 어깨로서 21일 밤 11시경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모 술집에서 싸움을 말리는 헌병에게 폭행을 가하고 술집 기물을 부순 것이라 한다."
 
그 시절에는 국회의원을 위협하는 깡패도 있었다. 1957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 3면 좌단에 따르면, 이 해에는 39세의 국회의원인 김두한이 대낮에 서울 명동 거리에서 "명동의 왕자인 R의 부하"인 "B"로부터 폭언과 모욕을 받고 폭행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김두한을 '전설의 깡패'로만 여겼다면 B가 그런 행동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미움을 사는 조봉암의 진보당에도 가세한 적이 있는 야권 의원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김두한이 이승만의 자유당 편이었다면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깡패들의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7년 5월 25일의 장충단 민주당 시국강연회 방해 사건이다. 20여 만의 청중이 장충단공원에서 열리는 독재정권 규탄 집회에 모인 이날, 깡패 50여 명이 각목을 들고 단상으로 돌진해 연설회를 망친 이 사건은 경찰의 묵인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이날 현장에는 1천여 명의 경찰관이 배치돼 있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깡패들이 행사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경찰들은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27일자 <동아일보> 1면 중간에 실린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의 26일자 성명문에 "이날 천여 명이나 되는 경찰관들은 무엇 때문에 동원되었던가?"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경찰 1천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치깡패 50여 명이 야당 연설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은 깡패들의 꼭대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저 독재의 모습을 시민 여러분은 똑똑히 목격하였읍니다"라고 위 성명문은 말한다.
 
이승만은 깡패들까지 앞세워 국민과 야당을 억압했다. 1948년 5월 31일의 기도를 무색케 하는 일이 그 자신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런 이승만을 위해 기념관을 세우고 동상을 세우려는 시도가 진행되는 현실은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수사반장1958 이승만 제1공화국 정치깡패 이승만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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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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