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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로 찾아가는 우리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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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로 찾아가는 우리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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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로 찾아가는 우리 읍성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고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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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7화 모형으로 만든 청계천 오간수문, 왜 내가 부끄러운 건지

    [한양도성 순성⑧] 우리 읍성의 마지막, 장충동~광희문~흥인지문을 걷다

    1년 반에 걸친 한양도성 순례의 마지막 구간. 장충동 언덕은 일제가 왜인 거주지 확장을 위해 조성한 곳으로, 전후 족발골목이 형성되며 서민의 허기를 달래는 공간이 되었다. 광희문은 빛과 기운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나가는 시구문으로 불렸다.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발견된 이간수문과 오간수문은 도성이 물과 함께 살아온 생활 도시였음을 증명한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개발의 그늘에 눌린 노동의 현실을 드러낸 외침이었다. 도성 순례를 마치며 흥인지문 앞에서 봄을 맞는다....
    26.03.30 14:40 ㅣ 이영천(shrenrhw)
  • 66화 남산 밑으로 뚫린 세 개의 터널, 왜 이렇게 됐냐면

    [한양도성 순성⑦] 남산~장충동, 일제와 권력이 남긴 아픈 생채기

    남산 밑으로 뚫린 3개의 터널은 1970년대 독재 권력의 무분별한 개발을 상징한다. 장충단로를 따라 내려오면 남소문 터, 자유센터, 서울클럽 등 억압적 권위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특히 신라호텔 자리는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박문사 터였고, 경희궁 정문 흥화문이 침략자 사당 문으로 전락했던 치욕의 공간이다. 장충단은 고종이 희생된 신하들을 기리며 세웠지만 무기력한 군주의 후회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남산은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6.03.22 19:09 ㅣ 이영천(shrenrhw)
  • 65화 새 날개 펼치듯 뻗어있던 숭례문 성벽을 볼 수 없는 이유

    [한양도성 순성⑥] 숭례문~남산... 모진 권력의 시간을 견디다

    숭례문은 세종이 1448년 재건한 조선의 정문으로, 왕의 행차와 국가 의례가 이루어지던 절대 권위의 상징이었다. 남쪽의 불과 예를 상징하며 유교적 세계관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907년 헐린 후 1939년 퇴계로 개통으로 숭례문~남산을 잇던 도성의 기운이 단절되었다.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워 도성 수호의 산을 침략자의 제단으로 변모시켰고, 해방 후에도 남산은 권력에 이용당했다. 성곽 복원으로 남산이 도성의 안산으로 돌아왔으나, 터널과 도시 개발로 여전히 도성의 정기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26.03.15 12:04 ㅣ 이영천(shrenrhw)
  • 64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아픔으로 이식된 길이 있습니다

    [한양도성 순성⑤] 돈의문~서소문~숭례문

    저자는 인왕산에서 시작된 한양도성의 서쪽 구간을 따라 걸으며 헐린 성벽의 흔적을 추적한다. 돈의문에서 서소문까지 이어진 이 길에는 경교장, 각국 공사관, 이화여고, 배재학당 등 근대 건축물들이 자리 잡았다. 성벽을 무너뜨린 것은 일제지만, 사람과 재화의 흐름이 성벽의 강고함을 이겨낸 측면도 있다. 종교와 학교, 병원을 앞세운 침략적 근대화가 이 공간을 차지했고, 성벽 없는 도성은 가장 먼저 근대화가 이식·침투한 자리가 되었다....
    26.03.08 11:26 ㅣ 이영천(shrenrhw)
  • 63화 꼭 들러보세요, 한국을 사랑한 외국 기자가 남긴 '궁전'

    [한양도성 순성④] 창의문~인왕산~돈의문

    서촌의 차분함과 인왕산의 풍경을 통해 서울의 역사를 탐색하는 글이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터전이었던 서촌,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유명한 인왕산, 그리고 사라진 돈의문까지. 저자는 이 공간들을 걸으며 권력과 사랑의 무상함,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빠르게 지나쳐온 도시를 느린 속도로 다시 읽어내는 여정이다....
    26.03.02 11:14 ㅣ 이영천(shrenrhw)
  • 62화 왜 다른가 했더니, 권력이 바뀔 때마다 손을 댄 성곽

    [한양도성 순성③]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까지

    오랫동안 군사시설로 막혔던 한양도성 백악 구간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숙정문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진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등 여러 왕대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1·21사태 이후 문루가 추가되는 등 권력의 변화를 반영한다. 백악 마루에서 본 경복궁과 청와대의 배치는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과 공화정의 은폐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곽은 고정되어 있지만 사람과 재화는 그 아래를 흐르며 살아왔고, 이제 누구나 이 길을 거닐 수 있게 되었다....
    26.02.22 19:17 ㅣ 이영천(shrenrhw)
  • 61화 시간을 견뎌온 땅, 성북동의 두 얼굴

    [한양도성 순성 ②] 혜화문~성북동~숙정문을 통과하다

    혜화문은 원래 자리를 잃고 복원되었으며, 이제 기능보다 기억을 소환하는 장치로 서 있다. 성북동은 조선시대 고급 주거지이면서 동시에 도시 일상을 떠받친 곳으로, 빈과 부가 공간을 달리해 병존한다. 간송미술관과 심우장은 지켜냄의 정신을, 백악산 성곽길은 닫힘에서 열림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것은 도시인의 선택과 저항이 남긴 자리를 읽는 일이다....
    26.02.17 18:25 ㅣ 이영천(shrenrhw)
  • 60화 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한양도성 순성 ①] 낮은 성벽에 내려앉은 도시의 시간... 흥인지문~낙산~혜화문

    한양도성의 동쪽 구간, 특히 낙산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의 변화를 추적한 글이다. 왕권의 상징이던 동궁에서 시작된 도성은 1898년 전차 개통으로 교통로로 전락했고, 일제강점기 성벽 철거로 근대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창신동의 돌은 조선총독부 건설에 쓰였고, 낙산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2000년대 성곽복원 사업에도 불구하고, 이 낮은 성곽에는 도시가 겪어낸 모든 변화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26.02.08 11:50 ㅣ 이영천(shrenrhw)
  • 59화 제주의 수호신이었는데 '170미터'만 남은 읍성

    섬 생명을 보듬는 둥지였던 성곽... 일제강점기와 4.3의 아픈 역사가 서린 빈 자리

    제주읍성의 현무암 성벽은 제주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다. 오현단 부근에 남은 170여 미터의 성벽과 복원된 제주목관아는 한양의 멸시 속에서도 자존을 지켜온 제주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형상 목사가 산지천을 품기 위해 확장한 읍성, 1947년 관덕정 앞 총성으로 시작된 4.3의 비극, 그리고 2003년 국가의 사죄까지. 사라진 성벽 자리를 채운 바람처럼, 제주의 역사는 억눌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자존의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26.02.01 19:26 ㅣ 이영천(shrenrhw)
  • 58화 세한도 속 둥근 창문 집, 건축적으로 재해석한 제주 건물

    이재수의 난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탄생한 대정읍성 그리고 추사관

    제주 대정은 거친 바람이 만든 '바람의 땅'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키가 작지만 단단하고, 사람들도 '대정 몽생이'라 불리며 작지만 강인하게 살아왔다. 이재수의 항쟁과 정온, 추사 김정희 같은 유배인들의 절의와 예술이 이곳에 깃들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고고한 정신을 지켜온 대정의 역사는 읍성 돌 틈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26.01.25 17:56 ㅣ 이영천(shrenrhw)
  • 57화 설문대할망의 어깨에 놓인, 한라산에 몸을 숙인 읍성

    바람이 주인인 제주도 정의읍성

    제주 정의읍성은 한라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한 채 바람과 공존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북쪽에는 문 없이 두터운 성벽을 두어 한라산의 거센 바람을 막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다공질 현무암 성벽은 바람을 흘려보내는 제주의 지혜를 보여준다. 돌하르방이 지키는 이 읍성은 낙안읍성처럼 박제된 전통이 아닌 발효된 전통으로, 여전히 숨 쉬는 오래된 마을로 존재한다. 설문대할망의 숨결이 깃든 이곳은 한라산을 경배하듯 순응하며 비바람을 견뎌온 제주의 생존 방식을 보여준다....
    26.01.18 19:36 ㅣ 이영천(shrenrhw)
  • 56화 시체 더미에서 날아온 총탄, 끝까지 맞선 장군의 최후

    진주대첩 2차전투의 황진 장군과 진주성

    1593년 여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0만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다. 성안에는 황진 장군이 이끄는 5천 군사와 6만 백성이 있었다. 황진은 김시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끝까지 성을 지켰으나, 8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 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의암(義巖)의 전설을 남겼다. 진주성은 무너졌지만 7만 명의 희생으로 왜군은 더 이상 전라도로 진격할 여력을 잃었다....
    26.01.11 14:45 ㅣ 이영천(shrenrhw)
  • 55화 모두 투사가 된 전쟁, 부녀자들이 왜군에 들이부은 것

    진주대첩 속 생명을 잇는 빛이었던 '유등'... 진주성과 김시민 장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1차 전투를 중심으로 진주목사 김시민의 결사항전을 그린 글이다. 3천8백 명의 병력으로 3만 왜군에 맞서 성을 지켜낸 처절한 승리와, 남강 위로 떠다니던 유등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 안팎의 군사들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던 유등은 오늘날 진주의 축제로 이어져, 충의와 의기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6.01.04 14:01 ㅣ 이영천(shrenrhw)
  • 54화 묻혀버린 고된 노동, 사라진 성벽에서 얻은 위로

    선진리성과 삼천포, 그리고 침오정과 사천읍성

    사천 선진리 왜성은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1598년 11월, 순천왜성의 고니시가 보낸 구원요청에 시마즈가 출전했고, 이는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으로 이어졌다. 사천읍성은 임진왜란의 상처를 간직한 동시에 별주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자라가 잠들었다는 침오정에서는 권력과 민중, 느림과 빠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삼천포로 빠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닌 역사적 필연성을 담고 있다....
    25.12.27 19:43 ㅣ 이영천(shrenrhw)
  • 53화 명줄 기댄 공간, 그들이 불탄 집터에서 지켜낸 것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닿은 길... 섬진강 방어의 전초였던 하동읍성

    1597년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하동읍성에 머물렀던 이야기로 시작해, 섬진강 방어의 전초기지였던 하동읍성의 역사를 조명한다. 1417년 태종의 명으로 축조된 읍성은 왜구 침입과 임진왜란을 겪으며 파괴와 재건을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며 행정 중심이 현재의 하동읍으로 옮겨가고 읍성은 쇠락했지만, 여전히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영·호남을 잇는 화합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5.12.21 19:17 ㅣ 이영천(shrenrhw)
  • 52화 모진 영욕의 세월, 아름다운 섬 거제가 타고난 운명

    비워진 섬에 안착하려 여러 번 옮겨다닌 거제의 읍성

    거제도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지리적 위치로 인해 왜구 침략의 최전선이었다. 고려 말 공도화 정책으로 비워졌던 섬은 조선 태종과 세종 시대에 적극적인 해상 방어 정책으로 1422년 백성들이 돌아왔다. 처음 수월리에 정착했으나 방어상 문제로 1426년 사등리로 읍성을 옮겼고, 다시 물 부족 문제로 1453년 고현리에 최종 읍성을 완공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거제면으로 행정 기능이 이전되었다. 과거 왜구의 침략지였던 거제도는 현재 세계적인 조선업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25.12.15 21:21 ㅣ 이영천(shrenrhw)
  • 51화 쪼개진 두개골, 413년 만에 드러난 임진왜란의 비극

    부산의 뿌리 동래읍성...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순절도에 담긴 긴박한 순간들

    2005년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임진왜란 당시(1592년)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골과 무기가 출토되었다. 5살 아이부터 여성까지 처참하게 살해된 흔적이 413년 만에 드러났다. 송상현 부사는 왜군의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고 거부하며 항전했으나, 성은 함락되어 2만3천명이 희생되었다. 부산의 역사적 뿌리인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고, 1979년부터 부분 복원되었으나 여전히 그 역사적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
    25.12.07 11:06 ㅣ 이영천(shrenrhw)
  • 50화 부산진성을 점령한 왜군이 남긴 몹쓸 유산

    부산 왜관의 시작과 부산진성의 기억 그리고 도시의기원

    부산은 전통의 중심 '동래'와 근대에 성장한 '부산'으로 갈려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1490년 증산에 쌓은 부산진성은 왜구 침략 방비와 왜관 관리를 담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 첫 격전지가 된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의 장렬한 전사에도 함락되었다. 왜군은 이곳에 왜성을 쌓았고, 전쟁 후 조선은 출성을 활용해 부산진성을 재건했다. 현재 자성대로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의 상흔을 간직한 역사적 유산이다....
    25.12.01 10:55 ㅣ 이영천(shrenr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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