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31 13:48최종 업데이트 22.10.3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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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이 멀면 갈 곳은 지독한 고립과 외로운 영혼의 사막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 김승재

 
친절하고도 쾌활한 복지 택시 기사님을 만나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라디오에서 진상 고객의 폭언과 행패에 시달리는 감정 노동자 이야기가 나왔다. 줄줄이 소개되는 참으로 다양하고 황당한 사례 중에는 택시 기사와 대리기사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정말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이 있네요? 아휴, 어떻게..."


계속해서 웃음을 잃지 않던 여자 기사님이 내 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러게요.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짠하네요."

기사님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웃음 소리를 대신한 그 깊고도 짙은 한숨 속에는 또 한 명의 감정 노동자로서 그분이 겪어야 했던 아픔이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다'고 한다. 그런데 예외 없는 법칙 없고,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빤히 보면서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이도 있고, 못 봐서 그러는 이도 있다. 후자가 육체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라면, 전자는 정신적으로, 그러니까 마음의 눈이 먼 사람이 아닐까?

우리가 소통하려면 말과 글이 꼭 필요하겠지만, 진심을 알 수 있는 원활한 소통은 서로의 눈빛과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걸 '뇌파 동기화'란 말로 설명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고, 서로의 표정에 답이 있음을 충분히 경험하고 살지 않던가.

시력을 잃은 지난 10여 년 전부터 나는 상대의 눈빛과 표정을 보지 못해 말을 오해하고 심지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있다. 몰라서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인데 생각해 보면 이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해를 풀어줄 말이 있었고, 감정을 다독일 따뜻한 손길도 있었고, 모든 걸 날려줄 웃음도 있었으니까.

반면, 마음의 눈이 먼다는 건 얘기가 아주 다르다. 그건 마음이 닫힌다는 것이다. 보여도 보려 하지 않고, 들려도 들으려 하지 않고, 느껴져도 느끼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가 아닌 남과는 소통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게 생각보다 무섭다. 왜냐하면 마음의 눈이 멀게 되면 겉으로는 남에게만 아픔과 모욕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자신도 타락하고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속담이 있다. 뭔가 잘못된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의 본능을 말하는 것인데,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손님이 내뱉은 충격적인 말

한때 마음의 눈이 멀었던 나를 떠올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라디오에서 소개되던 진상 손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고, 힘드시겠어요. 우리 장애인 중에도 저런 진상들이 많으면 많았지 없지는 않을 텐데..."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답이 없던 기사님이 결국 사연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 이른 아침에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을 태운 적이 있었어요. 그분은 한눈에도 몸이 굉장히 불편해 보이셨죠. 그래서 나름 친절하게 인사하고 조심스럽게 차에 태워 드렸는데, 그분이 저를 노려보시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내 꼴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냐? 도대체 뭐가 좋은 아침이란 거야, 좋긴 뭐가 좋냐고?'"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어떻게... 아휴, 몸도 마음도 진짜 많이 아픈 분이셨나 보네요. 속상하셨겠어요."

"예, 좀 그랬죠.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서 아주 잠시지만, 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급히 사과했지요. 하지만 그분은 아무 답도 없이 그냥 고개를 돌리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조용히 운전만 했는데, 차에서 내리시면서 인사를 하는 제게 또 이러시는 거예요. '나 같은 놈하고는 말하기 싫다 이거지? 병신이라고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만. 제기랄.'"


그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정상적으로 손님을 대할 수 있을 때까지 며칠이 걸렸다고 했다. 참 황당하지만, 이런 일은 드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절망과 우울의 감정과 맞서는 데는 웃음만큼 확실한 게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나는 가능하면 웃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일까. 복지택시를 탄 내게 당신들의 답답하고 억울한 속내를 넌지시 털어놓는 기사님들이 가끔 계시다.

어떤 분은 규정대로 복지카드를 보여달라고 했다가 봉변을 당하셨고, 어떤 분은 그냥 켜 놓은 라디오 프로그램 때문에 욕을 먹었다고 했다. 불친절하다고 혹은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핀잔을 듣고 욕을 먹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 같았다.

그날 라디오에서 소개된 진상 고객은 모두 비장애인들이었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하거나 아플 때는 이렇게 남에게 화풀이, 그러니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50대 아저씨나 다른 장애인 손님들도 그랬을 것이다.나 역시 비록 기사 분들에게는 그런 적이 없다지만, 아내나 가족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어쩌다가 혹은 아주 짧은 시간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만약 그렇다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눈이 먼 것일 수도 있다. 설마 그럴 리가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주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면, 안타깝게도 누구나 나처럼 마음의 눈이 멀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도 개인적이어서 그것의 객관적 경중은 중요하지 않다.

남들은 다 잘사는데 나만 불행하다는 착각

내가 시력을 잃고 분노와 우울의 늪에서 헤맬 때는 내게 닥친 이 장애와 고통이 오직 나에게만 던져진 불행 같았다. 난 지독히도 운이 없는 존재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아무런 걱정도, 그 어떤 고통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아무 잘못이 없는데 세상이 잘못돼서 내게만 이런 재앙이 덮친 것이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잘못된 세상의 수혜자인 것만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는 내 신세를 떠올리기만 하면 다시금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일었고 결국 그것은 잘못된 세상과 그 세상의 수혜자인 남을 향해 폭발했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실제 그렇게 남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욕을 퍼붓다 보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이건 정신적 마약이다. 또다시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얻으려면, 마약 중독자들이 그러듯이 좀 더 강도를 높여 누군가를 비난하고 헐뜯고 욕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웃음은 나를 향한 비웃음이 돼 버리고, 누군가의 친절한 말은 내게 던진 비아냥으로 변한다. 그리고 남이야 충격을 받든 아픔을 겪든 그건 관심이 없다.
  

마음의 눈이 먼다는 건 마음이 닫힌다는 겁니다. ⓒ 김승재

 
결국 소통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사라져 버리고, 지독한 소외감을 느끼며 끝없는 고립에 빠져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의 난 그렇지 않다. 비록 육체적 시력을 잃었고, 아직은 회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까지 멀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 멀었을 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당연하지 않을까? 마음이 닫혔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 무섭다. 마음의 눈이 멀었던 그때 다행히도 나는 등산화를 신고 밖으로 걸어 나왔고, 가상의 눈으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며 사람들을 만났다. 사소하지만 보람 있는 내 일을 찾았고 그래서 다시 희망이 살아났다.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나는 다시 마음의 눈을 조금씩 뜰 수 있었던 것 같다.

파란 가을 하늘이 예쁘다는 소릴 들으면 그때는 슬펐다. 하지만 지금은 열심히 나만의 파란 하늘을 그려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눈과 입을 빌려 멋지게 덧칠도 해 본다.

단풍 구경을 가자 하면 그때는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기꺼이 함께한다. 덤으로 주어지는 여행의 즐거움도 있으니까. 영화 얘기를 하면 그때는 우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이 영화관에도 간다. 가상의 눈으로 보는 영화 역시 무척 재밌으니까.

나는 바보 멍청이 쪼다같이 살지 않으려고 그리고 이왕이면 잘 살려고 남과 공감하고 소통했다. 난 남과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되는 오직 나란 걸 깨달았으니까. 세상은 절대 나를 위해 움직이지도 않고, 나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원한다면 내가 해야 하고, 필요하면 내가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가까운 남도, 아무리 친절한 남도 결국은 남이다. 그저 도울 수 있을 뿐, 결국은 내가 해야 한다. 나는 세상을 향해, 남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손을 뻗어야만 잘 살 수 있다. 그러면 남은 생각보다 많은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인데 그게  또 생각보다 따뜻하다.

내 마음의 눈은 아직은 덜 떠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도와 줄 남이 있고, 노력할 마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운이 좋다. 그런데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더해 경제적·사회적 아픔까지 헤쳐가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과 소통하려고 애쓰는 장애인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세상과 공감하려는 것이다. 사회도 이들 아니 우리 장애인 모두와 공감해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육체적 장애가 없는 사람 중에는 마음의 눈이 먼 사람이 진짜 별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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