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28 21:24최종 업데이트 23.02.0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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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한강공원 멀티플라자 광장. ⓒ 성낙선

 
여의도만큼 자전거 타기 좋은 곳도 드물다. 자전거도로 주변에 먹을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놀거리까지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자전거도로는 늘 무리를 지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자전거동호회 사람들, 연인들이 주로 타는 2인승 자전거가 수시로 지나간다. 주말에는 아예 사람 반, 자전거 반이다. 유원지가 따로 없다. 하지만 여의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의도가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여의도 강변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곳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단지 '모래벌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 여의도는 원래 평탄하고 너른 백사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름이면 서울 시민들이 마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 여의도에서 과거 모래벌판의 흔적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강변 둔치에는 여러 가지 휴식 시설이 잘 조성돼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면, 제방도로 너머로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다.

해질 무렵의 공원 잔디밭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눈을 씻고 봐야 할, 괄목상대할만한 변화다. 모래벌판이 빌딩숲, 사람숲으로 바뀌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동안 여의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알고 보면, 여의도는 정말 불가해한 섬이다.
 

여의도한강공원 멀티플라자 광장으로 들어서는 길. 여의나루역. ⓒ 성낙선

여의도 고층빌딩들. ⓒ 성낙선

  
어느 날 여의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

여의도는 사실 모래벌판이 다가 아니었다. 섬 일부 지역에 초지가 형성돼 있어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나라에서 말을 놓아 기르는 목마장이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가축을 길렀다는 기록도 있다. 섬 한쪽에는 높이가 50m에 불과하기는 해도 당당하게 '산'으로 대접받았던 '양말산(혹은 양마산)'이 있었다. '말을 기른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당연히 사람도 살았다. 하지만 모래벌판 소리를 듣던 곳인 만큼 결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큰물이 질 때는 양말산을 제외한 섬의 대부분이 침수됐다. 그럴 때마다 섬에 고립된 사람들 일부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래서 여의도는 아무것도 탐낼 게 없는, 그래서 아무도 탐을 내지 않았던 섬이었다.

그런 여의도에 1968년, 거친 모래바람이 아니라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울시에 개발 광풍이 불던 때다. 한강에서는 '공유수면매립사업'이 진행됐는데 여의도도 그 사업 대상에 들어갔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 서울시장이 육군 준장 출신이어서 그런지 개발을 무슨 군사작전 전개하듯이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개발 현장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여의도를 개발하려면 먼저, 둑을 쌓아야 했다. 장마가 질 때마다 여의도가 물에 잠기는 일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여의방죽(일본말인 윤중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 이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둑을 쌓는 데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개발 광풍으로 건설 자재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의방죽을 건설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과 흙이 필요했다. 그만큼 큰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떠난 현재의 밤섬. 서강대교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풍경. 1968년 섬이 폭파된 이후, 그 자리에 다시 모래와 흙이 쌓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큰비가 내릴 때는 섬 전체가 물밑에 잠겼다가 다시 드러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1999년 서울시 최초로 생태경관보전 지역으로 지정됐다. 2012년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는 지역으로 인정받아 생태계 보전지역인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 성낙선

  
국가 권력에 희생된 밤섬의 비극

서울시는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가능하면 추가 금액 없이 신속하게 자재를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밤낮으로 여의도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던 그들에게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구상이 하나 떠올랐다. 여의도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밤섬'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밤섬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대대로 배를 만들거나 농사와 어로 활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500명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밤섬은 또 경치가 아름다워서 시인 묵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강에서는 보기 드물게 바위 언덕이 있는 섬이었다. 마포8경 중에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그런 밤섬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서둘러 공사를 끝마쳐야 했던 사람들에겐 그냥 돌과 흙이 잔뜩 쌓여 있는 자재 더미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결국, 여의방죽 공사를 시작하기 하루 전날인 1968년 2월 10일, 한겨울에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밤섬을 폭파했다. 밤섬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순식간에 대량의 돌과 흙으로 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밤섬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한강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와우산 산비탈로 쫓겨났다. 더 멀리 쫓겨날 판이었는데, 밤섬 주민들이 고향 땅 근처에 머물게 해줄 것을 간청한 결과였다. 아름다운 밤섬은 그때 그렇게 사라졌다. 그곳에서 700년을 이어온 주민들의 삶도 함께 수장됐다. 여의방죽을 쌓는 공사는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공사는 번갯불에 콩 볶듯이 요란하게 진행됐다. 전국의 중장비를 동원해 24시간 둑을 쌓았다. 그리고 장마가 지기 전인 6월 1일, 작업을 완료했다.
 

'한강개발' 기념비. 1968년 6월 1일, 여의방죽 준공을 기념하며 세운 비석. 대리석에 박정희 친필 휘호를 새기고, 오석에는 공사 내역이 적혀 있다. 마포대교 남단. ⓒ 성낙선

 
치밀한 계획 없이 시작된 도시 개발

거기까지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처럼 서둘러대더니, 도시 개발은 여의방죽을 준공하고 나서 3년 가까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군인 출신 시장 당시 수립한 신도시 건설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럴 거면 애초 공사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밤섬을 그렇게 폭파했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계획은 전면 수정됐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양말산 자리에 국회의사당이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방송국들이 여의도로 자리를 옮겼다. 더불어 수많은 시범아파트들과 고층 건물들이 건설됐다. '최신식'을 지향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큰 성공을 거뒀다. 초기에는 분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단 분양이 되고 나서는 아파트 가격이 다락같이 올랐다. 고층아파트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말은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다. '땅 팔고 집 팔고 서울로'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았다. 서울은 당연히 더 많은 상업 시설과 주거 공간이 필요했다. 도시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도시 개발이 국토의 균형 발전 등 미래를 내다보는 치밀한 계획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건설업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신도시 건설은 인구 집중을 더 가속했다.

그야말로 건설사들이 호황을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건설사들은 허허벌판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이런 식의 개발이 여의도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잠실, 반포, 압구정 등에서도 거의 똑같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기관과 의기투합한 건설업자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거둬들였을지 감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의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사진 오른쪽으로 샛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 성낙선

  
'여의도 육지화'에서 겨우 살아남은 샛강

여의도 개발에는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를 흐르는 샛강을 매립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샛강을 매립해 여의도를 아예 육지화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육지화가 논란이 되고 있는 와중에 한강에 홍수가 나면서 이 아이디어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샛강 매립이 한강의 담수 공간을 줄여 더 큰 홍수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샛강을 매립하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을 지어 올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샛강은 다행히 샛강생태공원으로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샛강생태공원은 샛강을 따라 형성된, 수풀이 우거진 녹지공간으로 여의도한강공원과는 매우 다른 환경을 보여준다. 이곳의 미로 같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어느 산골 계곡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호젓하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산책을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자전거도로 역시 한적한 편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강공원 자전거도로를 지나, 생태공원 자전거도로를 달리면, 쾌적한 느낌마저 든다. 이 자전거도로에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 하나 있다. 아름드리 미루나무 다섯 그루가 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이다. 한강에서 미루나무를 보는 일이 흔치 않다. 아름드리 미루나무는 더욱 더 보기 힘들다. 이 미루나무들은 여의도 개발의 역사를 그대로 지켜봤을 산증인들이다. 샛강 매립이 아이디어로만 그친 덕에 이 미루나무들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의도를 여행할 때마다 나는 이 미루나무들에게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의 아름드리 미루나무. ⓒ 성낙선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를 한 바퀴 도는 데 빠르면 30분, 느리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전체 주행 거리는 8km 정도에 불과하다. 의외로 짧다. 이 좁은 공간 안에 엄청난 규모의 자산이 집적돼 있다. 여의도 모래벌판이 황금벌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겨우 손때 묻은 가재도구만 챙겨 떠나고, 누구는 모래와 돌을 황금으로 바꾼 다음 덤프트럭에 싣고 떠났다.

여의도는 자전거 타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오래 머무르기 어렵다. 내 발밑에, 여의도 백사장과 그 백사장에 얽힌 사람들의 추억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 발밑에, 마포8경 중에 하나로 꼽히던 아름다운 밤섬과 함께 고향 땅을 잃고 타지를 떠도는 밤섬 주민들의 아픔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고층 건물들의 각진 그림자가 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윤중제'는 일본말이다. '방죽'으로 풀이된다. 우리말을 두고 왜 일본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이 말을 가져다 쓴 사람들의 친일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서울시는 1986년에 윤중제를 '여의방죽'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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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음 도서들을 참고했다.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2> 손정목 지음, 2003년
<한강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찬,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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