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0 19:22최종 업데이트 23.02.0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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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처럼 잔잔한 한강. 가양대교 남단에서 방화대교 가는 길에서 바라본 풍경. ⓒ 성낙선


서울에서 보게 되는 한강은 매우 정적이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호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의 잔잔한 호수 말이다. 어떤 때는 한강이 거대한 웅덩이 안에 갇힌 물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좀처럼 생동감을 느끼기 힘들다.

한강변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음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은 정체돼 있고, 그 물을 둘러싼 환경은 지나치게 시끄럽고 복잡하다. 무엇보다 자연스럽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다. 섬조차 섬이 아니다. OO도, OO섬이라 이름 붙은 것들도 이름뿐, 다리가 연결되면서 육지화한 지 오래다.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산책하다 보면, 간혹 느닷없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보게 될 때가 있다. 0.5초,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몸뚱이가 꿈틀 물 위로 솟구쳤다가 이내 풍덩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그럴 때 겨우, 한강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짧다. 그때뿐, 강은 금세 다시 검고 깊은 정적 속으로 침잠한다.

하등 쓸모가 없는 일이지만 가끔, 그렇지만 매우 강렬하게, 한강을 60년대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한 번쯤은 꼭 70년대 이전의 한강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가서 꼭 보고 싶다. 1968년 한강개발3개년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지기 전, 그때의 한강으로.
 

석촌호수 부근 송파나루터 표지석. 한강 개발 이전에 이곳까지 강이 흘렀음을 알게 해준다. 잠실도와 잠실도 남쪽을 흐르던 송파강 등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육지화하면서 강폭이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나루터는 사라지고 표지석 하나만 남게 됐다. ⓒ 성낙선


한강의 가장 큰 변화는 택지 조성을 이유로, 한강의 공유수면인 백사장을 매립하고 제방을 쌓는 데서 일어났다. 이때 강폭이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바닥을 깊게 파냈다. 결국, 그 과정에서 강안의 모래사장이 모두 사라졌다. 강안뿐만 아니라, 강줄기 한가운데 하중도로 존재했던 여러 섬들도 거의 모두 사라졌다. 여의도에 가까이 있던 밤섬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공유수면을 매립해 형성된 택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이 이때 생겨났다.

인터넷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쩌다 한강 모래사장에서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너무 낯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진들을 보고, 한강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쪽배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낯설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흔한 풍경이었다. 강변뿐만 아니라, 하중도에도 모래사장이 넓게 깔려 있었다. 여름철이면 그곳에서 수영을 하는 등 물놀이를 하러 나온 사람들이 물새만큼이나 많았다. 한강 어디를 가도 모래섬과 모래사장을 볼 수 있었다. 모래사장이 얼마나 넓었던지, 한강 수위가 낮을 때는 섬과 섬 사이, 섬과 육지 사이로 모래톱이 연결돼 서로 걸어서 오갈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실 석촌호수 주변 풍경. 60년대까지만 해도 섬이었다. ⓒ 성낙선


그 많던 모래사장과 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잠실도'는 여의도만큼이나 큰 모래섬이었다. 잠실도가 섬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한강은 지역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그때 잠실도 위쪽으로 흐르는 강은 신천강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은 송파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강 개발 과정에서 송파강을 메워 잠실도를 육지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됐다. 오늘날의 잠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잠실도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가 '국가 시책'이라는 말에 억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살던 집과 땅을 버리고 떠났다. 그 땅에 지금은 우리나라 최대 고층건물인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서 있다. 이 땅이 나중에 '롯데제국'이, 강남의 금싸라기땅이 될 줄 알았다면, 당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그렇게 쉽게 그 땅을 떠날 수 있었을까?

송파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강을 매립하면서, 강줄기 일부를 남겼는데, 그 부분이 지금의 석촌호수가 됐다. 석촌호수에 가면, 이곳의 강물이 깊어 매립을 하지 못했다는 안내문을 볼 수 있다. 간혹 석촌호수를 저수지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석촌호수는 어디까지나 인공호수다.

'부리도'는 잠실도의 형제섬이었다. 한강 수위가 낮을 때는 잠실도와 하나가 됐다가 물이 차면 둘로 갈라졌다. 한강 개발 과정에서 잠실도와 함께 육지가 됐다. 부리도 자리에 현재는 종합운동장이 들어서 있다. 잠실도와 부리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양잠을 하던 곳이었다. 뽕나무밭이 지천이었다. 잠실도와 부리도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부리도 밑에는 '무동도'라는 이름의 작은 바위섬이 있었다.
 

부리도 표지석.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이곳에 부렴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표지석. 잠실동 아시아공원 내. ⓒ 성낙선


'저자도'는 잠실도에서 서쪽으로,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돼 있던 섬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가문의 정자나 별장이 있었던 섬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모래사장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저자도의 모래와 자갈을 파다가 압구정동의 공유수면을 매립해 택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난지도'는 잠실도처럼 육지가 된 섬이면서도 잠실도와는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아야 했다. 향기 좋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섬으로도 불렸던 이 섬은 육지가 되면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1978년 쓰레기매립장으로 지정되면서 서울 시민들이 쏟아내는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악취가 진동하는 땅으로 전락했다. 1993년 쓰레기 매립이 중단되면서, 지금은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저자도'가 있었던 곳. 한강과 중랑천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강변에 다시 퇴적물이 쌓이고 있다. ⓒ 성낙선

 

난지도 하늘공원. 쓰레기매립지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아름다웠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성낙선


'여의도'는 조선시대에 목마장으로 이용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비행장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는 모래섬이었다. 한강개발 과정에서 육지화를 겨우 모면하고 섬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억세게 운 좋은 섬이다. 여의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웃섬인 밤섬이 애꿎은 희생양이 됐다. 여의방죽을 쌓는 데 필요한 돌과 흙을 채취하면서, 밤섬은 물 밑 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밤섬'은 영영 그렇게 사라지는 줄 알았다.

'밤섬'은 놀랍게도 80년대 들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뿌리만 남은 자리에 다시 흙과 모래가 쌓여 지금은 그 면적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큰 섬이 되었다. 하지만 바위섬으로 '작은 해금강'이라 불렸던 예전의 그 아름다웠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밤섬에도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그 섬에서 지금은 텃새로 변한 민물가마우지들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텃세를 부리고 있다.
 

밤섬. 서쪽 끝 모래톱 위로 민물가마우지떼가 까맣게 내려앉아 있다. ⓒ 성낙선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수난, 60년대 이후 되풀이

'노들섬'은 원래 용산 쪽에 붙어 있던 넓은 모래사장이었다. 다른 모래사장과 마찬가지로 6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 피서지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모래사장 위로 철제 인도교를 건설하면서, 축대를 쌓고 인공섬으로 만들었다. 한강 개발 당시에는 섬 주변의 모래를 파다가 한강 둑을 쌓는 데 사용했다. 이후 2019년에 시민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선유도'는 한강에서 볼 수 있는 절경 중의 하나를 간직했던 곳이다. 겸재 정선이 산수화를 그려서 남겼을 정도다. 그 이름에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섬처럼 오래 수난을 겪은 섬도 없지 않나 싶다. 선유도는 원래 봉우리가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한 뒤, 한강에 제방을 쌓으면서 그 봉우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1929년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선유도의 자갈과 모래를 퍼다 나르면서 다시 섬 일부가 깎여 나갔다. 그로 인해 섬이 가지고 있던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섬은 수많은 곡절을 겪은 끝에도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섬에 신선이 놀던 곳 같은 절경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선유도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식물원과 정화원 등을 갖춘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꿨다. 노들섬과 선유도를 보면, 한강의 섬들이 겪게 될 수난이 이미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제가 노들섬의 모래사장을 파내고, 선유도의 봉우리를 훼손하는 과정이 곧 한강개발의 표본이 된 셈이다.
 

한강 선유도. 육지와 선유도를 연결하는 무지개다리. ⓒ 성낙선


한강에 있던 그 많은 섬들을 다 초토화하고 나서 한강에서 마주하는 풍경이 너무 밋밋했던지, 서울시는 한강에 다시 '섬'을 만들기 시작했다. 밤섬 같은 무인도는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자연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대교가 가로지르는 노들섬 같은 곳은 여러 가지 문화 시설을 갖추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친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반포한강공원에는 '서래섬' 같은 인공섬을 조성했다. 나중에는 강가에 '세빛둥둥섬' 같은 인공구조물까지 만들어 띄웠다. 앞으로 한강에 얼마나 더 많은 '섬'들이 생겨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본래 한강이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되찾을 수는 없다. 한강이 간직하고 있던 본래의 아름다움은 되살릴 수 없다.
 

잠실도 공유수면매립이 끝난 후, 아파트가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 석촌호수 잠실호수교 아래. ⓒ 성낙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시에서 도시계획국장 등을 역임했던 손정목은 자신이 쓴 증언록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전5권, 2003, 한울)에서 강남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한강개발과 관련해서는 "시대의 흐름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애석한 감을 금할 수 없다(326쪽)"고 피력했다. 그는 1968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이 한강개발을 '민족의 예술'이라고 강조한 것을 비판하며 "(당시의 한강개발은) 결과적으로 한강변이 지녔던 전원적ㆍ목가적 풍경의 말살, 예술적 정취의 말살이었던 것이다(같은 책, 327쪽)"라고 질타했다.

손정목의 비판은 '풍경과 예술적 정취의 말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더러 한강을 '젖줄'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한강이 누군가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자양분이 주로 누구 입으로 흘러 들어갔는지를 알면 젖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상당히 거북해진다. 손정목은 국가 자산인 한강을 젖줄 삼아 사익을 도모하던 사람들의 행태를 직접 지켜보고는 이렇게 한탄했다. 다 지나간 옛일로 치부하기엔 아직도 진행형이고, 과거 한강에서 자행된 "말살"을 생각하면 여전히 "너무나 애석한" 이야기다.
 
"(건설업자들에게) 공유수면 매립공사라는 것은 정말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라 아니할 수 없다. 국유하천을 막아 제방을 쌓고 택지를 조성한다... (중략)... 이 나라 굴지의 건설 회사들은 이런 장사를 되풀이해가면서 제3ㆍ4ㆍ5ㆍ6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십억ㆍ몇백억 원의 정치자금을 뿌리면서 비대해졌고, 그룹이 되고 재벌이 되고 마침내 국가경제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며 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나도 구속도 되지 않고 자유롭게 외국을 돌아다닌다. 그들은 과연 어떤 사주팔자를 타고났을까.(같은 책,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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