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30 15:42최종 업데이트 23.01.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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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현지시간) 영국 정부의 스코틀랜드 담당 알리스터 잭 장관이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초부터 스코틀랜드와 영국이 강하게 충돌했다. 스코틀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성별 인정법 개혁안'을 알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영국 정부는 연방 소속 국가인 스코틀랜드 관련 업무를 위해 내각에 스코틀랜드부를 따로 두고 있다)이 가로막았고 이에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강하게 반발했다. 잭 장관은 영국 정부가 사법권을 가진 사안에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되는 경우 해당 법안이 영국 왕실의 동의를 얻지 못하도록 규정한 스코틀랜드법 제 35조를 발동했다. 이는 1998년 해당 법률이 제정된 이후 시행까지 이른 첫 사례라고 한다. 가뜩이나 독립 여부를 놓고 진통을 겪어온 역사가 있던 와중에 다시 한 번 자치권 문제가 부상하게 된 셈이다. 도대체 성별 인정법 개혁안이 무엇이기에?

우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성별 인정법 개혁안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 과정을 획기적으로 간소화시킨 법안이다. 트랜스젠더는 출생과 함께 부여 받는 지정 성별과 실제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일치하는 법적 신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영국 정부는 2004년 '성별 인정법'을 제정했고 '성별 인정 증명서(Gender Recognition Certificate, GRC)'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 증명서는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이 출생신고서의 성별을 수정하거나 혹은 당사자의 성별에 맞게 혼인신고를 하게 만드는 등 주로 법적·행정적인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는 제도에 왜 개혁이 필요했을까?

보다 평등한 성별 인증 절차를 위한 개혁

여기에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2004년 제정된 법에 따른 성별 인정 과정은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고 절차 진행에 소요되는 시간 또한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길었다. 가령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을 겪고 있다는 의료적 증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담당하는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 젠더 클리닉은 대기시간이 무척 길어서 진단을 받는 데만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게 태반이다. 물론 성별 위화감 진단을 요구받지 않는 절차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성 전환 수술 요구를 포함하여 훨씬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를 맞출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애초에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또한 현행 성별 인정 과정은 트랜스젠더인 사람이 지난 2년 간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살아왔음을 증명하기를 요구하며 성별 위화감 진단이 없을 경우 이 기간은 6년까지 늘어난다.

스코틀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성별 인정법 개혁안은 기존 제도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우선 신청인이 성별 위화감을 겪고 있다는 의사 소견서 등 기존에 요구되던 의료 서류들의 제출이 필요 없도록 만들었다. 신청인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살아온 구체적인 증거를 제출할 의무도 없어진다. 또한 성별 인정 절차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 나이는 16세까지로 하향 조정된다. 기존 제도에서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는 법적 신분을 얻기 위해 시스 젠더(지정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동일한 사람을 이르는 말)인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는 증명과 절차를 과도하게 요구 받았다. 하지만 개혁안이 실행된다면 트랜스젠더 앞에 놓인 성별 인정을 향한 장벽은 대폭 완화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개혁에 왜 영국 정부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훼방을 놓았을까.

돌고 돌아 다시 불거진 트랜스젠더 혐오

표면적으로 제시된 이유는 스코틀랜드의 성별 인정법 개혁안이 영국 의회가 2010년에 제정한 평등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도 알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이 개혁안과 관련하여 2월 17일에 발표한 구두 성명 중 이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물론 저 문장만 봐서는 도대체 개혁안이 평등법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한 국내 언론사들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해당 성명을 모두 읽어 보아도 정확히 그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명확한 설명이 없다. 심지어 성별 인정법 개혁안 중 15A항은 개혁안이 평등법의 그 어느 조항도 수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알리스터 잭 장관이 표명한 우려는 그가 반대한 법안에서부터 이미 원천 차단되어 있던 셈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정황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알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은 앞서 언급한 성명에서 개혁안이 여성과 소녀들에게 미칠 잠재적 영향에 대한 우려를 영국 정부가 공공 및 시민사회 단체 인사들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개혁안이 영국의 성별이분법 체계에 혼란을 유발하고 사기와 오남용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도 언급했다. 이어 1월 17일 스코틀랜드 하원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 의원인 크리스티 블랙맨이 '성별 인정 증명서가 무엇인지 알기는 아느냐?'고 분노에 찬 질문을 던졌을 때는 이런 엉뚱한 답을 던지기도 했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아이를 위한 보호 장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만나게 되는 건 트랜스젠더,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을 둘러싼 해묵은 괴담이다. 남자들이 화장실, 탈의실 등 여성 전용 공간이나 쉼터와 같은 보호시설에 침입하기 위해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할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영국은 세계 여느 국가 중 유독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며 동시에 자신이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사람들(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세력이 강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사로 이제는 자신의 책보다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언사로 더 유명해진 J.K 롤링이 있다. 롤링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혐오 선동과 허위 사실 유포로 악명 높은 단체 스탠딩 포 우먼(standing for women)도 영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은 성별 인정법 개혁안이 통과될 기미를 보일 때부터 법안이 실제로 실행될 경우 누구나 쉽게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성 공간을 침입할 것이라 주장해왔다. 알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관의 구두 성명과 이어진 발언은 이런 혐오 가득한 주장을 교묘하고 세련된 정치 언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해리포터 작가 조앤 K. 롤링 ⓒ 연합뉴스


정치가 귀기울여선 안 되는 일에 집중할 때 벌어지는 일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성별 인정 증명서는 트랜스젠더인 사람이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성별을 법적이고 공적으로 주장할 수 있도록 문서일 뿐이다. 결혼을 하거나 적합한 사망 증명서를 받거나 여권을 발급 받을 때나 사용한다. 개혁안을 공격하는 주장에 따르면 공공 화장실이나 탈의실 앞에 성별 인정 증명서를 인증할 수 있는 스캐너라도 달려있어야 할 텐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영국이 여성 폭력 문제가 심각한 나라인 것은 맞으나 성별 인증 제도로 그 경향이 악화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특히 남자들이 여성 전용 공간에서 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있지만 이들은 발급 받으면 돌이키기도 사실상 불가능 한 성별 인증 증명서를 기다리지도 애초에 발급 받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그냥 침입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 에이드 스코틀랜드, 강간 위기 스코틀랜드 등 스코틀랜드의 반성폭력 단체들은 이번 성별 인정법 개혁안에 지지를 표해왔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트랜스젠더든 시스 젠더든 성별 인정 증명서의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공공시설은 사용할 수 있고 특히 영국에서는 법으로 그 권리가 보호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법은 성별 인정법 개혁안의 반대 근거로 제시된 평등법이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문제로까지 불거진 이 사태는 영국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행정수반은 이 문제를 결국 법원으로 들고 가기로 결정했다. 영국 정부에 대한 스코틀랜드 국민의 감정도 좋을 리는 없어 보인다. 연방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근본적인 궁금증이 든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영국 정부가 얻으려고 한 건 대체 무엇일까. 영국 정부가 법정 싸움에서도 이기면 무슨 결과가 발생할까. 단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기존의 불편한 제도 속에서 여전히 고통 받게 될 뿐이다.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삶이 같은 괴로움 속에 놓이게 될 뿐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황당할 정도로 그것 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벌어진 이 사건을 아무리 살펴봐도 질문이 남는 이유다. 어쩌면 이 일은 정치가 절대 진지하게 경청해선 안 될 의견을 수용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우둔하고 괴상한 해프닝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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