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30 14:53최종 업데이트 23.01.30 14:53
  • 본문듣기

한일 외교당국이 16일 도쿄에서 일제 강제동원 노동자 배상 문제의 해법을 논의하는 국장급 협의를 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에서 열리는 국장급 협의에는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참여했다. 서 국장이 한국 언론에 한일 협의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 연합뉴스

 
지난 28일, 한일 외교부 국장급 협의를 이틀 앞두고 일본 언론이 강제징용(강제동원)에 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정부, 사죄 계승을 설명하는 쪽으로'라는 기사에서 정부 관계자의 말을 근거로 이렇게 보도했다.
 
"정부는 전 징용공 소송에서 한국 원고들이 요구하는 일본 측의 사죄와 관련해, 일본 기업의 배상을 한국 재단이 대신 인수하게 하는 해결책을 한국 정부가 정식 결정하면 과거의 정부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재차 설명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시하는 방향으로 검토에 들어갔다."
 
한국 정부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들의 불법행위책임을 대신 떠안는 방안'을 최종 결정하면 일본 정부는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시한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일본 기업의 책임을 묻지 않고 한국 재단이 대위변제하게 한다'는 방침을 공표한 지난 12일을 전후해 일본 정부는 '구상권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를 부각시켰다. 책임을 대신 떠맡은 한국 재단이 문제가 마무리된 뒤 일본 기업을 상대로 변상을 청구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서다.


이를 감안하면,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한국 정부의 최종안' 속에는 대위변제뿐 아니라 구상권 포기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그런 방침을 확정하면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 입장이다.

같은 날 <산케이신문> 보도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과하거나 배상할 의향은 없다는 점이 재차 강조됐다. '단독: 한국 화이트국가 회복 검토, 징용공 지켜보고 판단'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한국 정부가 문제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한국에 대한 2019년 경제보복의 철회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하면서 사과·배상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쇼와 40년(1965)의 일·한 청구권협정으로 징용공 문제는 다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30일에는 서울에서 일·한 국장급 협의가 열릴 예정이라, 일본 측은 재차 이러한 생각을 전할 계획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다뤄진 것은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손해배상청구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반 민사채권이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징용·위안부·징병 청구권도 그때 다 해결됐다면서 사과·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 입장을 30일 국장급 협의 때 재차 강조한다고 했으니,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도 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한 셈이다. 사과의 뜻을 담은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고 표명할 수는 있지만, 새롭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상처를 입힌 사람이 사과·배상한 다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용서하고 마무리하는 게 순리다. 위의 보도들에 나타난 일본의 해법은 이와 정반대다. 한국이 마무리하면 자신들이 후속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후속 행동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사과·배상이 아니라 과거의 사과를 계승한다는 입장 표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일본 정부가 언론에 흘린 것이다.

반성을 행동으로 증명하지 않았다
 

지난 28일 일본 <교도통신> 기사에 게재된 과거 일본 정부의 담화 세 가지. ⓒ 교도통신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 정부의 입장 표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과거 담화가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도통신> 기사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사과 샘플'이라 할 수 있는 과거 담화 세 가지를 표로 제시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이 담화의 핵심 요소를 계승한 2005년 고이즈미 담화, 그리고 2015년 아베 담화가 소개돼 있다. 일본 정부의 의중을 전달하는 기사에서 이 셋을 예시한 것은 무라야마 담화를 기초로 하면서 이를 응용하는 형태로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1995년 8월 15일 발표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담화는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치고 전쟁으로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트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다시 없도록,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나타내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심정'을 표시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대처법에 결함이 있다는 점도 노출했다.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피해 복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통절한 반성을 행동으로 증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를 직접 접한 당시의 한국인들이 그런 느낌을 가졌다는 점은 담화 이틀 뒤 <한겨레> 사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이 '무라야마 총리의 사과'인 이 사설은 "누구나 흔쾌한 느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담화를 비판한 뒤 "형식적인 그 담화 하나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무라야마 총리는 사과 담화를 발표해놓고도 손해배상과 국가보상 그리고 재산권 청구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라며 진정성을 의심했다. 또 일왕(천황)의 책임을 드러내지 않은 부분도 문제 삼았다. "무라야마 총리는 전쟁을 일으킨 국책의 잘못을 일본왕의 책임과 분리함으로써 전쟁책임으로부터 일본왕을 보호했다"라고 비판했다.

사설은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본왕인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추진한 데다가 일본의 국가원수는 예나 이제나 일본왕"이라고 강조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의 최고 책임자인 일왕의 잘못을 명시해야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표시한 것이다.

한국을 너무 모른다
 

18일 오후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소속 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 강제동원 해법 폐기’를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외교부앞에서 항의방문을 하고 있다. ⓒ 권우성


담화에 대한 비판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강렬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무라야마 내각의 각료들이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위 사설은 "무라야마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는 그 시간에도 일본 각료 10명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극우파들의 외침 속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고 전했다.

공동 여당인 자민당의 간사장(사무총장)도 반기를 들었다. 그해 8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일 총리 침략 담화 자민당 강력 반발'은 미쓰즈카 히로시 간사장이 22일 고위 당정회의 때에 '왜 국회의 의사와 동떨어지게 행동하느냐'라는 취지로 사회당 소속인 무라야마 총리를 추궁한 사실을 보도했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담화는 그 자체로 무게를 갖지만, 일본에서는 총리의 식민지배 담화만큼은 쉽게 무시를 당한다.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는 시간에 장관 10명이 침략전쟁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일주일 뒤 자민당 간사장이 공개 석상에서 총리를 추궁하는 모습은 일본 총리의 사과 담화가 한국인들을 움직이기는커녕 일본 내부마저 움직이기 힘든 현실을 반영한다.

사과·배상을 거부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기세는 대단하다. 그런 기세를 억누르고 사과 표명을 단행하기에는 총리 담화라는 형식이 허약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이 일본 내에서조차 무시되고 망언 속출을 초래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 내에서조차 제대로 호응을 받지 못한 무라야마담화나 그것을 잇는 역대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방식으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강제징용 문제를 봉합하려 한다. 이런 방식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기시다 내각이 한국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시다 총리의 입장 표명이 일본 내에서조차 호응을 얻지 못하면, 한국인들의 반응이 어떠하든 향후 일본에서는 망언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의 대처법은 문제를 종식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확산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가해자가 용서를 빈 뒤에 피해자가 용서해준다'라는 보편적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