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읍 우산공원에 세워진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윤태옥
인민재판과 같은 최소한의 절차도 없는 집단학살은 인민군이 후퇴할 때부터 대한민국 군경이 완전히 수복하기 전의 치안 공백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북한 노동당은 9월 중순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렸다.
전세가 불리해 후퇴한다.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한다. 유엔군 상륙 때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다.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한다.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해 식량을 비축한다. 입산 경험자와 입산 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남강원도까지 후퇴하라.
후퇴기의 학살은 교도소 수감자와 일반 민간인 두 범주로 나뉜다. 북한은 9월 20일 각 지역 교도소 수감자에 대한 조치를 하달했다. '북으로 후송하거나, 후송이 불가능하면 현지에서 적당히 처단하라'는 것이다. 이 지시에 의해 납북자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경우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 수감자들은 의정부와 춘천으로 이동했는데 가는 도중 적지 않은 수가 학살당했다. 수복 후에 미국 대사관과 해병대원이 약 1천 구의 시체 더미를 발굴한 게 그것이다. 양평의 한강둑에서도 800여 구를 발굴했다.
대전에서는 대전형무소,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경찰서 등에서 1500여 명이 학살됐다. 전주형무소에서도 최소 수백, 최대 1000여 명이 학살됐다. 창고에 갇혀 있던 240~250명을 불을 질러 집단학살을 했던 충남 서천등기소 사건은 특히 그들의 대표적인 잔혹사건으로 운위되곤 했다.
수감자가 아닌 일반 민간인들의 학살도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전북 고창, 전남 영광의 경우가 심했다. 고창에서는 인민군 6사단이 전주에 진입한 1950년 7월 20일 고창경찰서장이 해산명령을 내렸다. 경찰들은 고창의 동호항을 떠나 목포로 철수했다.
인민군은 장항, 군산, 부안에 이어 7월 하순 저항 없이 고창을 점령했다. 곧바로 노동당 조직을 건설하고 임시인민위원회를 추진했다. 고창경찰서는 내무서가 되고 지서는 분주소가 됐다. 7월 26일 면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인민군 점령은 2개월 정도 지속됐다. 이때 반동숙청 명분으로 우익인사를 처형하고 토지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이 9월 20일 군산 앞바다 상륙하고 전북경찰 선발대가 전주를 11월 28일, 고창읍은 이틀 후인 30일 수복했다. 고창 주둔 인민군은 이미 철수했고 인민위원회도 해산했으나 고창의 좌익세력은 선운산, 방장산 등에 입산해 유격전으로 버텼다. 군경과 빨치산의 전투는 이듬해 3·4월까지 계속됐다. 거의 6개월의 치안 공백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비해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사건이 많았다.
피해자는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거나 좌익 세력과 관계가 나빴던 사람들이다. 면장 이장이나 군인·경찰 경력자와 그 가족들이 큰 피해를 당했다.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군유마을의 정씨 일가다. 1950년 10월 7일 가장 격인 3인이 먼저 희생됐고, 모두 25명이 학살을 당했다. 혜정마을의 양씨 일가도 29명이나 희생됐다. 그 외에 11명, 12명, 5명, 7명 등 가족 단위로 죽음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청을 받아 조사해 154명의 희생자를 확인한 경우 기간별로는 인민군 점령기간에 2명이었고, 군경의 수복 후에는 4명이었으나 치안부재 기간에는 자그마치 139명이나 됐다.

박종현
전남 영광에서는 단기간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전국 어디든 비슷했지만 영광에서도 지역사회 안에 이미 좌우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청년단에 배속된 장교를 중심으로 300여 병력의 청년방위대가 만들어졌다. 인민군이 점령하기 열흘 전인 7월 12일 염산면에서 이미 인민유격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즈음 군경에 의한 영광지역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7월 23일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하고 2개월 동안 인민군 치하가 됐다. 내무서와 분주소라는 공식적인 치안조직 이외에 9월 중순 노동당 지역조직이 주도하는 특별 자위대가 만들어졌다. 도 단위의 총사령부 아래 시·군-면-리-마을 단위로 당 책임자를 대장으로 세워서 조직한 것이다.
인민군은 9월 하순 철수했으나 영광 역시 즉시 치안이 회복되진 못했다. 면 단위로 유격대(빨치산)를 조직해 반동숙청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 동안 학살이 지속됐다. 좌우를 포함한 전체 희생자 규모가 전국에서 최고 많았다. 공보처에서 1952년에 발행한 6.25사변 피살자명부에는 영광의 희생자가 2만 549명이다. 영광 총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실제 희생자를 이보다 많은 2만 5000명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충남 당진에서는 1950년 9월 28일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후에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와 함께 적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활동할 것으로 판단되는 자들을 사살하라고 지령한 것이다. 9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에 60~70명씩 끌려 나갔다. 세 차례 총살을 집행했고, 죽창으로 살해한 것도 목격됐다. 장소는 지금의 당진시 서해로의 우두동 고개 부근이다.
이런 사례는 내가 몇몇 기록을 보고 직접 찾아간, 아주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역시 대한민국 군경이 저지른 학살과 마찬가지로 인민군 점령지 전체에서 예외 없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를 이끌었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는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희생자는 전체적으로 5만에서 7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서로의 몸뚱이에 톱질... 너무도 무모한 한국전쟁

▲영암읍교회 순교비
윤태옥
남이든 북이든 유사한 기제가 있는 것 같다. 전세에 밀려 인민군이 후퇴하자 세상이 또다시 뒤집힌다는 위기감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걸리는 게 있으면 반동분자로 지목하고는 반동분자보다 훨씬 더 반동적인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한국전쟁은, 고도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념을 명목으로 내세우고는, 문명은 내던진 채 상대방을 절멸하겠다는 부족의 전쟁을 한 것이다. 신념은 증오가 되고 무력은 정의가 됐다. 공포에 싸인 생존욕과 끓는 욕망과 이기(利己)를 밑바닥에 깔고 전쟁이란 살상의 환경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는, 두 손으로 광기의 살륙극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남과 북이 서로의 몸뚱이에 톱질을 해댄 것이다. 한국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전쟁이었는지 새삼 절감한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북한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자의든 타의든 사과하고 반성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이 황해도 신천의 대학살에 대해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미군의 폭격에 대해 아무리 함성을 내질러도 나는 전혀 그들만큼 들뜨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북한이고 좌익이고 김씨 삼대라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침묵하고 묵살하기 때문이다.
상하든 좌우든 전후든 있을 것들이 있고, 그것들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이루어야 공명(共鳴)이 커지는 법이다. 반성도 있어야 규탄의 내용도 들여다볼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내가 대한민국을 그들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고향나라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경제발전과 국민소득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오는 게 가장 크다. 그 위에 자신의 과오에 대해 소극적이라도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에서도 나온다.
적대세력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정부 차원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소재로 수없이 등장했다. 해당 지역별로 주로 자유총연맹이나 언론사 등이 위령 사업을 진행하면서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를 자유수호희생자위령비나 애국지사 영령비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영광읍 우산공원 위령비
윤태옥
전남 영광읍의 우산공원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라는, 긴 이름의 위령비가 있다. 이것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이후에 세운 것이다. 영광군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희생자 전부를 함께 추모하고 있다. 위령비의 비문 일부를 옮겨 싣는다.
... 늦었기로 원망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다행히도 국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립해 진실을 정리하는 이 마당에서, 이제 우리도 슬픔과 용서 그리고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평화와 통일로 가는 추모의 장을 여기에 만들어 하루빨리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탑을 세우게 됐습니다. 오직 추모와 화합의 장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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