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된 홍명보 감독이 자신을 보좌할 외국인 코칭스태프 선임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자 지난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기에 앞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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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시 마시(미국) 감독과 다비트 바그너(미국) 감독은 대표팀 감독 선임이 유력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시 마시 감독은 독일 분데스리가 RB 라이프치히를 강팀으로 만들고,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선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맡았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대한축구협회 측에 대표팀 선수들의 움직임 개선 방법을 3D 모델로 제시할 정도로 한국행에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허더스필드타운 AFC를 EFL 챔피언십(2부)에서 프리미어리그(1부)로 승격시키고, 분데스리가 FC 샬케04, EFL 챔피언십 노리치시티의 감독을 맡았던 다비트 바그너 감독 또한 PPT만 50장 이상을 준비해서 게임 모델 등 자신의 축구 철학을 대한축구협회 측에 설명했다고 합니다. 박지성 전북현대 테크니컬 디렉터가 지난 12일 "한국 역사상 이렇게 많은 외국인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길 원한 적이 있었나"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본부 총괄이사에 따르면 5일 밤 이 이사가 홍 감독을 찾아가서 설득했고, 6일 오전에 감독직 수락을 한 거더군요. 즉, 홍 감독은 면접도 없이 '특채'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대한축구협회가 홍 감독에게 K리그가 열리는 도중에 대표팀 감독직을 제안하는 것도 K리그와 팬들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감독을 빼가는 것은, 한 축구클럽의 체계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홍 감독은 단 하루만에 마음을 바꿨고, 울산을 떠났습니다.
이 이사 말에 따르면 홍 감독 선임은 감독 연봉을 아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외국인 감독과 한국 감독의 연봉 차이가 있는데 이 부분도 당당하게 (협회에) 요구했다"라며 홍 감독의 연봉을 외국인 감독 수준으로 준다고 말했습니다.
대표팀 감독 선임 작업을 맡은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박주호 해설위원은 지난 7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홍 감독 선임은)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하나도 없다"라고 폭로했습니다. 나아가 "(전강위 내부에서는)국내 감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위원들이 많았다. 어떤 외국 감독을 제시하면 무조건 흠을 잡았다(...) 전체적인 흐름은 홍명보 감독을 임명하자는 식으로 흘러갔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박 위원의 증언은 내부적으로 원칙을 세우고 엄밀하게 평가하는 흐름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그 전강위마저도 지난달 30일 정해성 위원장의 사퇴로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이 이사가 전권을 넘겨받고 홍 감독 선임이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정훈님은 이 상황이 납득이 가시나요?
국민들 의구심 해소하지 못하고... 불명예스러운 감독 자리

▲지난 10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하나은행 K리그1 2024 울산 HD와 광주FC의 경기에서 울산 HD 팬들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홍명보 감독과 대한축구협회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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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국민의 세금이 투여되는, 공적 지위를 가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이렇게 불투명하게 선임해도 되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홍 감독에겐 의구심을 해소할 책무가 있습니다. 외국인 감독이 아닌 자신이 대표팀을 맡을 적임자임을, 대표팀을 경쟁력 있게 만들 수 있는 명확한 계획이 있음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홍 감독은 엉뚱한 이야기를 했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요.
5일 기자회견에서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나왔다" "축구 인생 마지막 도전"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강한 승부욕" "정말 강한팀으로 한 번 도전" "저는 저를 버렸다"(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저저버' 혹은 '나나버'라는 약어로 쓰이기도 합니다)와 같은 홍 감독의 말을 들으면서 '자아도취'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한 번 실패했지만 다시 도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대표팀에 대한 비전이나 구상보다 더 앞서 있었다고 느꼈다면 과한 해석일까요?
대표팀 감독은 한국인 축구 지도자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저는 저를 버렸다'면서 마치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가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했습니다. 마지못해서, 아무도 대표팀 감독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맡는 자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기자가 울산팬들에게 전할 말을 묻자 "저의 실수로 인해 이렇게 떠나게 됐는데..."라고 답했을 때는, 왜 '선택'을 '실수'라고 말하는지 의아하다는 반응도 나왔습니다.
'홍명보의 의지'가 과도하게 강조되는 바람에, 정작 홍 감독의 축구 철학이 무엇인지, 만들고 싶은 대표팀의 '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15일 외국인 코치 선임을 위해 출국하던 자리(인천공항)에서 연 기자회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축구를 할 계획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한국 대표팀만의 규율뿐만이 아니라 우리만의 문화를 저는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한국 팀에 들어와서 정말 편안하고 즐겁게 정말로 강한 마음으로 축구를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했습니다.
반면 벤투 감독은 지난 2018년 8월 취임 인터뷰에서 "공을 점유하며, 경기를 지배하며, 최대한 많은 기회를 많이 창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습니다. 말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4년 내내 '주도하는 축구'는 벤투호의 정체성이었죠. 이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우루과이, 포르투갈과 대등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오죽하면 박지성까지 나서겠나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 2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클린스만 국가대표팀 감독 경질을 발표하고 있다.
권우성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실패와 그 이후의 오명은 한국 축구 최고의 수비수였던 '월드컵 영웅' 홍명보에겐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겁니다. 그 실패를 기어코 만회해보겠다는, 자신의 달라진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그 욕망은 이해가 갑니다. 10년 동안 얼마나 절치부심 했겠습니까.
하지만 박지성, 박주호, 이동국 전 선수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들이 이미 홍 감독의 선임을 '잘못된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박지성 디렉터는 "한국 축구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라며 정몽규 협회장과 홍 감독의 감독직 사퇴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홍 감독은 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후배들의 비판에 대해 "저는 지금 현장에 있는 사람이고 이 대표팀을 이끌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의견들을 잘 받아서 제가 좋은 것들은 잘 팀에 반영해서 나가도록 하겠다"(15일 기자회견)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눙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리더의 가장 큰 자질은 신뢰와 소통인데, 홍 감독은 그 모든 것을 잃은 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 선임과 경질 과정에서 이미 대한축구협회는 '시스템 부재' '독단적 운영'이라는 의혹을 받으며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정몽규 아웃'은 어느새 젊은 축구팬들의 유행어처럼 굳어지고 있죠. 신뢰 없는 협회에 의해 불투명하게 선임된 감독, 비전이나 축구 철학마저 불명확해 보이는 감독을 신뢰할 축구 팬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정이 나쁜데 결과가 좋을리 만무하고, 운 좋게 단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인 결과가 좋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정훈님,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부모님을 따라서 축구장에 온 어린 축구 팬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국가대표팀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클럽을 힘껏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무엇보다 '과정이 좋아야 결과가 좋다'는 진리를 축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축구에서만큼은 꼼수나 편법이 없다고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대표팀 소집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늦지 않았습니다. 홍 감독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 때,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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