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군 설마리전투비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추모공원. ⓒ 윤태옥
빨간 단풍은 많은 사람들을 가을 길로 유혹한다. 휴전선 지역을 십여 차례 계절마다 답사여행을 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으로 꼽는 곳이 바로 설마리 영국군전투비가 있는 추모공원(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110-2)이다.
공원의 주제가 되는 조형물은 영국군의 베레모다. 글로스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국군 부대의 역사와 참전, 귀환 등의 기록이 베레모를 둘러싸고 있다. 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1957년에 세운 원래의 참전비가 있다. 2014년에 새로 조성된 추모공원의 안내판에는 전투약사가 기록돼 있다.
"1951년 4월 22일은 따뜻한 봄날씨였으며 바로 이날 임진강 격전은 시작되었다. 전투 첫날 밤 글로스터 대대는 병력이 10배에 달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용전하였다.
글로스터 연대는 혈전 끝에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5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26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180명의 부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년 간의 포로수용소에서 34명이 사망하였다. 이 격전에서 글로스터 연대는 2명이 최고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모든 장병들의 희생정신은 세계 전사에 빛나고 있다."
중국군의 5차 공세(4.22~5.22)의 4월 공세가 시작되자 영국군 29여단이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맞아 감악산과 임진강 사이에서 벌인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다. 29여단 글로스터 연대의 3개 대대는 감악산의 북서쪽 산록인 설마리와 인근에서 중국군의 주공인 19병단 예하 63군단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중국군의 공격은 강력했다. 우측의 2개 대대는 진내까지 침투한 중국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두 시간 만에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중국군은 감악산을 점령했고 글로스터 나머지 1개 대대는 설마리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29여단의 주력부대도 포위될 위험에 처하기 시작했다. 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증원부대 투입이 불가능하다고 알리면서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판단에 따라 적중을 돌파해 철수하거나, 그게 아니면 중국군에 투항하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위의 전투약사에 기록된 바와 같다. 설마리에서 이렇게 희생을 일방적으로 감수하는 동안 유엔군의 다른 부대들은 서울 북쪽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설마리의 영국군 전투는 한국전쟁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의 하나였다. 우리 공간사(公刊史)에서는 중국군이 참전 이후의 전황을 다섯 차례의 공세로 나눠 기술하고 있다.
'쾌속북진' 들떠있던 유엔군의 패닉
중국군의 1차 공세는 10월 25일 쾌속 북진에 들떠있던 유엔군에게 강력한 매복 공격을 가하여, 청천강까지 단숨에 격퇴했다. 1차 공세는 11월 5일 전선에서 중국군이 별안간 사라질 때까지다. 앞의 글에서 소개한 압록강 초산에서의 급박한 후퇴, 운산의 비극들이 이 시기에 벌어진 전투들이다.
유엔군은 아직 중국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 11월 24일 작전명조차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면서 북진 공격을 재개했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27일 총공세를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크리스마스 작전은 11월 25일 시작된 중국군의 2차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진격을 멈췄을 뿐 아니라 이내 심각한 수세에 빠졌다. 중국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를 시작했으나 곳곳에서 퇴로까지 차단당하며 중국군에게 포위되기 일쑤였다. 매질을 당하는 형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군우리 전투나 장진호 철수작전이 모두 이때 벌어진 참혹한 패전들이다. 곧이어 평양과 흥남에서 철수해야 했다.
유엔군은 패닉에 빠진 듯 38도 선까지 밀렸고 12월 14일에야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잇는 주저항선을 설정했다. 미8군 사령부도 대구로 이동했다. 쾌속북진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어진 전황 속에 장기전에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엔군은 동서로 220km에 달하는 산악지대에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방어선은 종심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 곳만 뚫리면 방어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중국군의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31일 저녁에 시작됐다. 신정공세라고도 부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에 일반적으로 패퇴하던 인민군이 병력을 수습하고 부대를 정비하여 다시 대규모로 전선에 나선 것이 이때부터였다. 인민군 3개 군단이 중국군 6개 군단과 함께 3차 공세에 투입된 것이다. 이를 위해 중조연합사령부가 설치됐다. 중조연합군 병력은 36.5만이었고, 유엔군은 전투병력이 25만이었다.
3차 공세가 시작되자 유엔군은 전선 곳곳에서 뚫릴 위험에 처했고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서울을 포기하기로 했다. 1월 4일 한강 부교를 통해 국군과 유엔군 전부가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날 오후 1시 부교는 폐쇄되었고, 오후가 되자 서울 하늘에는 다시 인공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철수하면서도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고, 중국군과 인민군의 보급선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반격하려고 했다. 서울을 포기한 유엔군은 1월 7일 평택-삼척을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1월 8일 전체 전선에서 중국군이 또다시 사라졌다. 중국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수원-용인-이천-여주-원주를 잇는 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중국군은 참전 이후 38일 동안 하루 평균 10km씩 남진하는 동절기 전투로 인해 피로가 상당히 누적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북한 인민군이 당했듯이 후방의 상륙작전을 포함한 유엔군의 치명적인 반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군의 공세 역량이 한계에 도달하고 유엔군이 전력을 수습하면서 전선은 37도 선에서 멈췄다. 미국이 극비로 검토했던 철군계획이 그대로 실행됐다면 중국군이 37도 선을 50km만 더 돌파해 금강 선에 도달했을 때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군하고, 한국 정부와 군은 제주도로 철수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은 더 이상의 추격을 멈췄다. 이제 전황은 중국군의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이 교차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유엔군의 반격과 중국군의 마지막 공세
37도 선까지 후퇴한 유엔군은 중국군의 정확한 전력과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 작전을 실시했다. 이것이 곧 중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1차 반격이다. 중국군 개입 이후 최초의 반격은 미25사단이 오산-수원에서 1월 15, 16일 이틀에 걸쳐서 벌인 울프하운드 작전이었다. 성공적이었다.
서부전선에서 더 강력한 위력수색 작전인 선더볼트 작전도 수행했다. 유엔군은 2월 10일에는 노량진-영등포 선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중서부전선에서도 한강선으로 진출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인민군이 침투를 저지하고 홍천을 포위 공격했다. 동해안에서도 강릉-대관령 선까지 진출했다. 중국군의 3차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37도 선까지 물러섰으나, 중국군의 한계를 확인하고 반격의 전환점을 찾은 것이다.
중국군의 4차 공세는 1951년 2월 11일 횡성 지역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2.13~16)가 이때 벌어졌다. 미2사단과 프랑스 대대가 중국군 3개 사단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미8군단장 리지웨이가 지평리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자 미2사단 23연대는 전체 병력을 일선에 투입해 중국군의 철야 공격을 막아냈다. 2월 14일에는 보급품을 공중에서 투하할 정도였다. 미5기병연대의 지원도 유효했다. 이들은 전차 23대를 종대로 세워 보병 160명을 탑승시킨 채 적중 6km를 돌파했다. 종대만 1.5km가 될 정도였다.
이런 과감한 작전을 성공시켜 유엔군을 연결하자 중국군은 공세를 멈추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4일간의 지평리 고수 방어전은 중국군의 개입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공세를 물리친 귀한 승리였다. 전선의 지휘부는 물론 동경과 워싱턴의 전쟁 지휘부에게도 희망을 주는 신호였다.
중국군의 4차 공세가 멈추자 유엔군은 38도 선을 향해 바로 2차 반격에 나섰다. 유엔군은 제천과 영월의 적군의 주력을 목표로 킬러라는 명칭의 두 번째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2월 21일에서 3월 6일까지 횡성 탈환을 목적으로 4개 사단이 병진하며 공격하여 횡성-평창 목표선까지 도달했다. 중서부에서는 리퍼 작전이 전개됐다. 서부의 중국군과 동부의 인민군을 갈라쳐서 서울을 탈환하자는 뜻에서, 전선을 절단하는 리퍼를 작전명으로 삼았다. 이 작전은 킬러 작전의 연장으로 3월 7일부터 말까지 계속됐다.
중서부에서 리퍼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서부에서는 서울 탈환 작전이 시작됐다. 3월7일 미25사단이 한강을 도강했다. 중조연합사령부는 3월 10일 예하 부대를 서울에서 철수시켰고, 유엔군은 큰 전투 없이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150만이었던 서울의 인구는 겨우 20만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한편 본국의 전쟁지도 방침에 반대했던 맥아더는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후임은 미8군단장 리지웨이였고, 미8군단장에는 벤플리트가 임명됐다.
중국군의 공세가 4월 22일 다시 시작됐다. 5차 공세의 4월 공세다. 이때 도입부에서 소개했던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군은 4월 공세에서 서울 북쪽까지 접근했으나 유엔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다. 중국군의 공세는 1주일 정도가 한계라는 게 또 한 번 실증된 셈이었다. 중국군의 1주일 공세 후에는 유엔군은 또다시 반격을 했다. 4월 공세로 빼앗긴 지역의 반 정도를 탈환했다. 5월 9일에는 김포반도-봉일천(파주군 조리읍)-의정부-가평-춘천 선으로 방어선을 정비했다.
중국군과 인민군은 '5차 공세의 5월 공세'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부전선의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서부전선의 유엔군과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이 5월 공세에서 잊지 못할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으니 그게 바로 현리 전투다. 국군의 참담하고 부끄러운 패전이었다.
계급장까지 떼고 도피...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5월 16일 중조연합군의 준비사격에 국군 7사단은 이미 큰 피해를 입었다. 통신선이 절단되면서 지휘통제 능력을 조기에 상실하고 말았다. 7사단5연대는 대부분의 진지를 빼앗기고 분산 철수했고, 8연대도 지휘소가 피습됐다. 7사단은 철수작전을 수행할 능력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중국군은 7사단을 공격하고는 오미재(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의 고개)를 점령했다. 오미재는 7사단 우측에 있는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의 보급로이자 퇴로였다. 중국군은 5월 17일 새벽 1시 국군 3군단의 2개 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 3군단은 포위된 채 전후방에서 공격을 당했다. 유재흥 3군단장은 9사단장의 철수 건의를 묵살했으나 9사단장은 새벽 4시 임의로 철수했다. 군단장의 지휘는 부실했고 사단장은 직속상관의 지휘를 무시한 꼴이다.
이제 현리 일대는 국군 3군단의 3사단과 9사단에 7사단의 5연대까지 모여들어 큰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보급로이자 퇴로인 오미재가 차단됐다는 소식에 현리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런 난국에 국군 3군단장 유재흥은 자신의 부하인 3사단장 김종오에게 지휘를 위임하고는 항공편으로 하진부리의 군단지휘소로 가버렸다. 자신이 지휘할 부하 사단장에게 지휘를 위임한 것도 지휘인가. 공간사에는 유재흥이 복귀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도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휘가 부재한 상황에서 현리에 모여든 다수의 국군 장병이 뒤엉킨 채 퇴각하고 중국군이 기습해 오자 대오는 금세 무너졌다. 3사단은 8km나 늘어선 차량과 중장비를 불태우거나 항공 폭격으로 파괴하고는 후퇴했다. 사단장 이하 대부분의 지휘관이 지휘를 포기하는 계급장을 떼고 무질서하게 도피했다고 한다. 과연 계급장까지 떼었을까. 결과를 보면 그게 전부 사실이었을 것 같다. 5월 19, 20일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3사단은 고작 34%, 9사단은 40%에 불과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8군사령관은 국군 3군단장 유재흥에게 하진부리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으나 군단장 유재흥은 물론 3군단 전체가 허겁지겁 중구난방이었다. 이렇게 국군 3군단이 붕괴하자 유엔군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큰 손실을 당한 유재흥의 국군 3군단은 통상적인 후방에서의 부대정비로 넘어간 게 아니라 아예 편제상에서 해체해 없애 버렸다.
개전 초기의 전쟁준비 열세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후퇴와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과 유엔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이런 참담한 패전을 저지르다니. 내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용감한 국군은, 안타깝게도 현리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 유엔군의 3차 반격작전 상황도.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출간한 <한권으로 읽는 6.25전쟁> 390쪽.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전장에서 죽은 것은 권력자나 정치인이 아니었다
중국군의 개입 이후 다섯 차례의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속에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은 막대한 물량을 쏟아붓고 엄청난 희생자를 냈지만 전선은 개전남침 이전의 38선 부근에서 출렁대는 양상이었다. 결과는 강대국의 힘과 이익이 근거리에서 직접 교차하는 한반도에서 상대방을 물리력으로 절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미군의 참전 이전에 전쟁을 신속하게 끝낼 수 있다고 오판한 북한은 전면전이란 역사의 죄업을 자처했으나 미군의 역습에 무너졌다.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신생국가 중국군을 경시했다가 치명적인 패전을 당해 38선을 포기하고 37도 선까지 밀렸다.
게다가 유엔군을 지휘한 맥아더는 보복과 확전만 주장하다가 해임됐다. 부실한 전쟁준비로 초기 패전의 최고 책임자인 '북진통일' 대통령 이승만은 50만 명을 무장해서 4개월씩 훈련하게 해달라고 미국에 요구했다. 그 50만 명이란 게 국민방위군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하고 부패한 손으로 50만 장정 중 9만여 명을 허무하게 희생시켰음은 앞에서 살핀 바와 같다.
이 기간에 휴전 논의도 있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중국은 거절했다. 미국은 전장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중국군 존재를 무시하듯 '선휴전 후협상'이라는 일방적인 제안을 했다. 중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미군의 타이완 철수라는 완전한 굴복까지 요구했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서로 수용할 수 없는 주장만 한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전쟁의 희생자는 엄청나게 늘어만 가고 있었다. 남북의 젊은 장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엔군 16개국에서 지원이란 이름으로 차출되어 온 장병들 그리고 중국에서 지원군이란 참전한 이들도 그렇다. 전장에서 죽은 것은 권력자나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결정을 수행하게 된 젊은 장병들이었다.
▲ 영국군 설마리전투를 추모하는 조형물. ⓒ 윤태옥
다시 설마리를 떠올린다. 그곳의 영국군 추모공원은 설마리 전투 사상자들을 추모하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군인의 생사와 군대의 생존이 무엇인지를 묵묵히 알려주고 있다.
전쟁과 군대에서 지휘관이란 부하 장병들에게 전사의 순서를 정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국군 여단장의 철수 또는 투항 명령이 바로 그랬다. 죽음이 짙게 드리워 있지만 그것을 따르고 희생을 감내하는 게 군대고 규율이고 명령이다. 누구나 군인정신이고 장렬한 희생이라고 기리지만 그 속내는 어떤가. 이런 죽음을 산처럼 쌓으면서 전선의 우열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나는 게 현실이고 역사다. 참으로 잔인하다.
이와는 반대로 직속부하 사단장조차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될 명령을 내린 군단장, 절체절명의 전장에서 지휘권을 부하 사단장에게 떠맡기고 지휘소 복귀란 이름으로 도망친 군단장, 사수하라는 유엔군 상관의 급박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수는커녕 부하 장병들을 무질서한 후퇴 속에 방기한 군단장을 떠올리게 된다.
남의 나라 전쟁에서도 군인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설마리 영국군 추모공원에서, 독립운동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수많은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국립현충원에 그 군단장이 장군 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떠올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참으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