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 찍은 김두황의 모습.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가족 사진이다.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김두황이 죽은 뒤 1년 남짓 지났을 때 김두황의 부친은 집안에서 창밖을 보고 계시다가 허깨비처럼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보름 정도 누워있다가 유언 한 마디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당신의 나이 72세 때였다. 이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김두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막내 아들 사진만 쳐다보고 계셨다. 저러다 어머니마저 잘못될까 싶어서 두황이의 사진을 모두 치웠다. 어머니는 점점 말을 잃어가셨다. 큰형이 어머니를 청주에 모시고 계셨는데 두황이의 기일에 맞춰 서울에 모시고 가려고 채비하던 중이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신 어머니가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구석에 웅크린 모습으로 숨이 멎어 있었다."
김두황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 사진을 볼 수 없게 되자 머릿속에 있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으나 점차 김두황의 모습을 닮아갔다. 또 어머니는 "내 가슴에 이 상처를 그 누가 알아주나. 그리움에 타는 마음 혼자 달래고 혼자 울면서 지새울 때…" 라는 일기를 되풀이해 써갔다. 다른 자식 앞에서는 슬픈 내색을 안 하시던 어머니가 매일 밤 글로 비통함을 적은 것이다.
김두황을 먹잇감으로 삼은 보안사
내가 5월 3일 자대로 가고 두황이가 이틀 동안 연대 보안반에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 알 수 없어요. 자대에 배치되고 6월 18일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죠. 두황이는 성북서의 고문을 이겨내며 81학번 예비 지도부에 대해선 어떤 실마리도 건네지 않았어요. 어쩌면 보안사는 이것을 노렸을지도 몰라요.
김두황이 자살을 준비한 정황이나 조짐은 없었다. 낙천적 성격이기도 한 그는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4월 30일 신병 훈련을 마쳤을 때 김두황은 훈련 성적이 우수해 보병 제68훈련단장 문금주 준장으로부터 1등 상을 받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인 6월 8일경에 김두황은 양창욱에게 편지를 보내 연대본부에서 했던 다짐대로 "웅변대회에 참가해서 특별 휴가를 얻어 나가자"라고 독려한다. 이 편지를 받고 고무된 양창욱은 연대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거둬 실제 포상휴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두황의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훈련소 동기로서 두황과 자주 만났던 황 이등병은 의문사 진상 제1기 조사위에 나와 김두황이 했던 말을 진술했다. "보안부대 관계자로부터 입대 전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동료들의 명단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주지 않았다."라고.
황 이등병의 말대로 보안사는 고려대 학생운동의 중심 노릇을 한 김두황을 주목하고 그의 진술을 탐냈다. 성북서의 이강수 형사는 고대 80학번 김희근에게 "김두황에 대해 더 조사할 것이 있지만 그냥 보충대로 떠나보냈다"라며 '아쉬워'했다라고 한다. 아바타방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시경은 1983년 봄 문건 작성자를 여섯 명으로 압축하고 이 중 일부가 강제 징집된 것으로 파악을 했다. 서울시경은 이 정보를 보안사에게 건네주었을 테다. 보안사로서는 고려대 예비 지도부를 캐내고 '아방타방' 집필자를 찾기 위해서 김두황을 탐나는 먹잇감으로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당시 22사단 헌병대 송 조사계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한다. 그는 2008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출석해 "김두황이 자대에 전입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대에 연행되어 학생운동 당시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여러 차례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김두황의 지휘 계통인 중대장이나 대대장에게 들었다"라고 말했다.
22사단 55연대 보안반장이 의문사위에서 한 진술은 더 구체적이다. "특수 학적 변동자에게 수신되는 서신은 보안반 관계자에 의해 검열되었다. 또 해당 사병이 발송하는 서신은 소속 부대 간부들에 의해 사전 검열되었다. 또 보안반 담당관이 소속 부대에 은밀히 활용하는 망원들에 의해 동향이 수집되고, 소속 부대 중대장을 통해 한두 달에 한 차례씩 동향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라는 보안반장의 증언에 비추어 보면 김두황은 혹독한 감시 상황에 놓였을 게다.
내게도 보안사의 손길이 뻗어왔어요. 9월에 특별휴가라면서 22사단에서 보안사 과천분실로 끌고 가더군요. 심사 장교 권 00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가 여기 온 것은 아무도 몰라. 말 듣지 않으면 쥐도 새로 모르게 죽여서 월북 기도하다 죽었다고 철책에 버려놓으면 끝이야"라고 협박했어요. 여러 날 동안 가둬 두고 자술서를 쓰게 했어요. 쓰고 또 쓰고 완전히 발가벗겨졌죠. 마지막에 태극기 앞에서 서약을 시켰습니다. 거부할 방법이 없었죠. 심사를 마치고 내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충무로 진양분실로 보내더군요. 거기서 고대생을 담당한 박준현이 세 가지 과제를 주었어요. 그중 하나가 겨레사랑회,사회학회,학회장단 모임의 체계도를 보여주면서 이 도표상에 나온 사람의 현황을 파악해 오라는 지시였어요.
양창욱이 과천분실에 불려갔을 때 그는 김두황의 죽음으로 여전히 충격 상태였다. 보안사는 양창욱과 김두황이 단짝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녹화공작에 착수했다. 사실 양창욱에겐 김두황의 죽음 이전에 더 큰 아픔이 있었다. 입대한 지 보름도 안 돼 양창욱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양창욱이 군에 끌려가고 입었던 옷이 집으로 배달되자 양창욱의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자신이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을 지냈던 터라 이 험한 시국에서도 자기 아들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끌려가자 몸과 마음이 허물어졌다. 결국 그는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양창욱은 자대 배치 후 불과 열흘 만에 접한 아버지의 소식에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양창욱은 큰 슬픔을 겪은 처지였으나 보안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락치로 활동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두황의 죽음은 밀알이 되었어요. 그는 고대 학생운동의 조직 노선을 학회 중심의 대중 노선으로 바꿔내고 81학번 예비 지도부를 비밀리에 키웠죠. 80년대 고대 학생운동은 두황이를 빼고 설명할 수 없어요. 그는 죽어서도 밀알이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