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7 16:54최종 업데이트 24.11.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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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영화애호가로서 나는 영화 공부를 겸해 주목할 만한 영화평론집이 나오면 구해 읽는다. 몇 년 전 읽은 남다은 영화평론집 <감정과 욕망의 시간>의 한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독립영화의 나쁜 경향을 저자는 예리하게 비판한다.

"현실이 이토록 힘에 겨운데, 영화가 그 현실보다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게 떠오른 두 분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꼭 삶과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럴 거면 영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라고 장률 감독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로 분노하는 일보다, 분노의 틈에서 삶의 생기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껴안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도 새삼 느낍니다."


저자의 고민은 문학(비평)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문학은 현실의 모방이나 재현 아니다. 문학은 또 하나의 현실이다. "현실에 대한 꿈으로서, 욕망으로서. 기억으로서, 마음"으로서의 문학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다. 필요한 건 독자가 아는 현실과 작품이 창조한 현실을 견주고 비교하고 포개면서 우리가 아는 현실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그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믿고 있는 세계의 구멍을 느끼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이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기에 훌륭하다는 식의 가치 평가는 온당하지 않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현실을 충실히 모방한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

영화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디스테이션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작품이 10여 년 전에 많이 나왔다. 나는 그런 비판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자동적으로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도 그런 계보에 속한다.

기자 출신답게 작가는 당대, 그리고 지금도 지속하는 한국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포착한다. 현실을 충실히 모방한다. 소설을 바탕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문제의식은 같다.

20대 후반의 주인공 주계나(고아성)는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녀의 삶은 원작이 나온 2015년이나 지금이나 그 또래 젊은이가 겪는 고통을 여러 방식으로 재현한다. 계나는 인천 변두리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 "그저 가족들 안 아픈 것이 좋다"고 믿으며 사는 엄마, 진로를 찾지 못해 고민하는 여동생과 함께 산다. 계나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재개발 계획으로 들썩인다.

계나 부모는 24평 새 아파트에 들어갈 중도금 3천만 원을 계나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계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 1호선, 2호선을 갈아타면서 2시간 걸리는 회사로 출근한다. 이렇게만 적어도 계나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계나가 새로운 삶터로 삼는 뉴질랜드를 이상향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뉴질랜드에도 사람살이의 여러 모습이 나타난다. 계나 같은 이주자는 영어를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이런저런 인종 차별이 있다. 계나가 머물렀던 교포 가족을 비롯해 다들 어려움이 있고 불의의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만이 제공하는 뾰족한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어디서 이미 다 본 얘기다. 계나와는 달리 한국에 남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계나의 대학 동기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취업 N수생 대학 동기 경윤(박승현)의 삶을 계나의 탈출과 비교하며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나쁜 버릇"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모임'과 고등학생 송희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겉표지문학동네

찾기가 힘들어진 남성 작가 중에서 돋보이는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이런 나쁜 버릇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한국 사회의 '을'에 속하는 젊은이의 독특한 관계를 다룬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아래 <두 사람>)과 남이 뭐라든 자기가 정한 목표인 100kg 역기를 들려고 애쓰는 여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무겁고 높은>(아래 <무겁고>)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의 미덕은 거창한 정치 담론과 연결해서 보통 얘기하는 '인터내셔널'의 의미를 두 남녀가 맺는 특이한 우정과 애정의 관계에서 새롭게 발견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알려준 장학금으로 간신히 대학에 진학했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는, 주계나와 비슷한 또래인 권진주와 4세대 고려인으로서 "기차에 태워 육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보내진 "십칠만여 명의 조선인" 중 "기차에서 각자의 가족을 잃은 뒤 손을 꼭 잡고 내린 두 사람"의 후손인 김니콜라이의 이야기를 작가는 솜씨 있게 엮는다.

짧은 단편이지만 작가는 중학교 시절에 우연히 같은 반 학생으로 만나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나고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 밥 먹는 사이가 되는 언뜻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되는지를 차근히 들여다본다.

<두 사람>을 읽고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신중하고 열정적인 시민들로 이뤄진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세상은 지금까지 그렇게 변해왔다." 진주와 니콜라이가 맺는 작은 인터내셔널이 그런 "작은 모임"의 형태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조금씩 더 넓어진다.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쳤다. 부부가 대접한 더운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진 않았지만 접시를 비웠고, 그 집 꼬마가 리코더 연주를 뽐냈을 때 박수를 쳤다. 집에 돌아와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억압적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을 한다. 나는 그걸 삶의 생기라고 부르고 싶다. 단 몇 사람이라도 그런 생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꿈을 꾸는 "작은 모임"을 형성한다면, 그게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다.

역도하는 사람pxhere

<무겁고>의 배경은 강원도의 폐광촌이다. 주인공 송희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송희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역도부원이다. 그녀는 촉망받는 역도 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목표로 삼은 중량 100kg을 들지 못하고도 역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송희는 그저 들 수 있을 만큼 들 뿐이고 들고나서는 버린다.

"송희는 역도에 이기는 게 있었는지 생각했다. 축구나 격투기라면 '이겼다' '졌다'고들 하지만. 따지자면 나는 94킬로그램만큼 이겼고 100킬로그램만큼 졌지. 안경은 114킬로그램만큼 이겼고, 119킬로그램만큼 졌어."

송희의 이런 모습을 뻔한 정신승리, 혹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승리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송희의 모습에서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남들의 시선에도 꺾이지 않고 자기 삶을 지키려는 존재의 단단한 품격을 발견한다.

그래서 송희가 "쇳덩이를 쥐고 두 발로 바닥을 밀어내는 순간"을 확인하고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라고 끝맺는 <무겁고>의 결말에서 안타까움이나 슬픔보다는 뭉클한 감흥을 받고, 안팎을 돌아보면 희망을 찾기 힘든 세상을 버틸 힘을 얻는다. 고등학생 송희에게 배우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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