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 인근에서 경찰에 저지된 뒤, 응원하는 시민들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주연
남태령에서 만난 핫팩 나눔과 배달 음식 후원 등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김밥 한 줄을 받으면 절반만 먹고 절반은 뒷사람에게 보냈다. 집에서 데워온 보온병 물을 옆 사람과 나눴다. 집회 현장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다 저체온증으로 쓰러질 뻔한 신미영(24‧여성의당 경기지부 당원)은 발 핫팩을 나눠주던 노인, 직접 가져온 귤을 나누던 여성 등 집회에 있던 이들이 "모두 따뜻하고 다정하셨다"라고 말했다.
새벽녘, 정금의 맨손에는 뜻밖에 장갑이 끼워졌다. 이미 10시간가량 혹한에 노출된 몸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던 정금을 어느 소녀가 붙들더니 자신의 장갑을 끼워줬다. 이어 어느 여성 농민은 정금을 자신의 차에 태워 히터를 틀어 몸을 녹이게 했다. 강원 강릉에서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남태령에서 밤을 꼬박 새운 김지우(활동명‧22)는 "400명이 참가하는 단체 카카오톡방이 개설돼 어느 출구에 사람이 부족하고, 물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공유해가며 현장 상황을 알려줬다"라고 밝혔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만큼 성황리에 진행된 시민 발언은 자주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들이 농민들 의제를 잘 모르고도 남태령에 온 것처럼 "논바이너리예요", "트랜스젠더예요" 하는 말들을 잘 몰라도 '끄덕끄덕'하는 분위기였다. 개별 의제를 얘기하면 "숟가락 얹지 마라" 하는 비아냥이 날아들던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 때와는 다른 풍경이다.
"그런 게 중요하지가 않았던 거죠. 최소한 그 자리에서는 '우리가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투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여기 모였다'는 생각을 공유했던 거 같아요. 필요에 의한 공동 전선이 아니라 여기 있는 동지들이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 하는 식으로요."(조단원)
정금은 "모두가 각자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응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들이 차벽으로 에워싼 곳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희한하게' 집회 현장 만큼은 "여자여도 성소수자여도 아무래도 상관 없이 자기 자신 그대로 있어도 안전한 공간"이었다.
"너무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여의도 집회 참석 후 혼자 집에 가다가 피켓을 든 저를 보고 젊은 남성들에게 위협을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 안에선 정말 희한하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농민이 여성이 시민이 국회의원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자리었거든요."
토리(가명‧30)에게도 그날의 자기소개들이 기억에 남았다.
"자기 소개할 때 정체성 그런 거를 밝히셨는데 모두 '그렇구나~' 하고 응원해 줬어요. 탄핵 반대하시는 분만 아니면 뭐 외계인이와도 환영할 분위기였어요."
혼자 '레인보우 플래그'(성소수자 당사자와 성소수자 인권 지지자인 앨라이를 상징하는 깃발) 하나만 들고서 남태령을 찾았던 '요술봉'은 이후 한강진까지 행진하면서는 6~7기의 무지개 깃발과 함께했다.
남태령이 연대의 장이 된 데는 '2030' 여성들과 퀴어들의 힘이 컸다. 인터뷰이들은 외양으로 성별을 짐작하는 일의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남태령에 청년 여성이 무척 많았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다. 여의도‧광화문에서 열린 집회보다도 남태령에 더욱 2030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는 남태령 이슈가 여성 유저가 많은 'X'에서 폭발적으로 '리트윗'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X'는 사람들 의견을 나르는 플랫폼에 불과할 뿐, 기본적으로는 혐오를 일상적으로 겪는 여성의 소수자성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서 받는 불이익과 그 불합리함을 그 어떤 때보다 절절하게 깨닫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불이익을 겪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숭고하게 표현하자면 이타심이겠네요. 현실적으로 판단하자면 품앗이일지도요."(여채현)
"'품앗이'라는 말은 나쁜 뜻이 아니라, 농촌에서 품앗이를 하듯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눠 든다는 의미"라고 채현은 부연했다.
불의에 항거할 의지·용기와 함께, 정보 접근성과 전파력이라는 자원을 모두 갖춘 이가 '청년 여성'이라는 진단도 많다. 요술봉은 "연대할 의지가 있으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청년 여성들과 소수자"라고 말했다.
조보리는 "소외된 자들은 나라에 관심이 많다. 좀 더 올바른 나라가 되길 꿈꾸는 마음과 동병상련을 품고 있기에 자발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라며 "정보 교류에 능하다는 강점도 있다. 다른 세대에 비해 실시간 소통에 익숙해서 응집력을 가지고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거 같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