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11 12:05최종 업데이트 25.01.1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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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의 항일투쟁 현장에도 1020 여성들이 있었다. 만주에서 전개된 무장투쟁에도 10대와 20대 여성들이 참여했다. 인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투쟁에 이 세대 여성들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를 놀라운 일로 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이 낮게 평가돼 있으므로 그들에 대한 조명 작업은 항상 필요하다.

그들 중 일부가 중국 옌볜인민출판사가 발행한 <항일녀투사들>과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 등에 소개돼 있다. 이런 자료에 기초한 방미화 옌볜대 교수와 현청하 옌볜대 박사과정의 논문 '여성주의 시각으로 본 만주 조선인 여전사의 항일운동'(2018년 <한국민족문화> 제69호)에 따르면, 만주 지역의 1020 여성들을 항일투쟁으로 이끈 주요 동기는 복수심·반봉건의식·계급의식·혁명인식 등이었다.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남존여비의 봉건질서에 반감을 품었거나, 일제 침략을 배후에서 추동하는 일본 자본가 계급과 투쟁하고 싶었거나, 단순히 일본을 몰아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민족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여성들이 만주 지역 항일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논문에 등장하는 32명 중 하나인 김영신은 "봉건적 남존여비 사상이 여자들을 까막눈으로 만들었으며, 눈을 떠야만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를 뒤엎을 수 있다"라고 인식했다. 김정길은 "일제와 지주, 자본가를 때려 엎고 우리 여성들까지 다 해방받는 날이라야 우리 인민이 진정으로 해방받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사상 최악의 억압인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철폐해야 여성들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독립운동의 광장으로 뛰어나갔다.

15살부터 항일운동, 허성숙의 활약상

연변렬사기념관에 전시된 허성숙 동상박도

논문에 언급된 또 다른 인물인 허성숙(許成淑)에게는 일제에 대한 투쟁이 어느 정도는 아버지에 대한 투쟁의 성격도 띠었다. 그가 그런 투쟁을 벌인 것은 아버지가 봉건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 기업이 운영하는 <중국민족문화자원고(資源庫)> 사이트에 실린 '조선족 항일여(女)영웅 2 - 허성숙' 편의 부제목은 '부녀가 원수가 된 이야기'다. 이 글은 "허성숙과 아버지 허기형은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 한 뒤 "(아버지는) 일본 침략자에게 의탁해 괴뢰 자위단 단장이 됐다"라고 말한다. 허기형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민병대장이었다. 허성숙은 그런 아버지와 "원수"가 됐다. 그래서 그의 항일투쟁은 특이하게도 항부(抗父)투쟁의 성격을 함께 띠게 됐다.

허성숙은 자위단 일을 그만두시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외면했다. 결국 허성숙은 아버지와 의절하고 항일유격대에 자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90년에 발행한 <국사관논총> 제11집에 실린 김창순 북한연구소 소장의 논문 '만주 항일연군 연구'는 허성숙이 3·1운동 4년 전인 1915년에 지린성(길림성) 옌지현에서 출생했으며 항일유격대에 들어간 뒤에는 기관총수로 활약했다고 알려준다.

15세 때부터 항일에 참여한 허성숙은 동북인민혁명군(훗날의 동북항일연군)이 수행한 대포차자전투·무송현성전투·동청구전투·임강현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1937년 6월 30일에는 새벽안개를 이용해 산을 포위한 일본군 2000여 명을 내려다보며 기관총을 발사해 타격을 입혔다.

그의 투쟁에서는 사격술뿐 아니라 희생정신도 빛나게 발휘됐다.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구해 돌아오다가 토벌대를 만나자, 전우들을 나무 사이에 숨긴 그는 배낭을 짊어진 채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 뒤 수류탄을 던져 적의 접근을 막고 전우들을 보호했다.

전투 현장에서 그는 아버지도 만났다. 동북인민혁명군 부대는 그의 고향 인근에서 허기형의 자위단과 부딪혔다. 위의 <중국민족문화자원고>는 이때가 1934년 7월이라고 알려준다. 지휘부의 명령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책임을 받은 19세의 허성숙은 아버지 쪽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총구를 왜구(원문은 일구·日寇) 쪽으로 겨누십시오. 일본 침략자들이 우리 동포들을 도살하고 우리 마을을 불질러 태웠는데,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우리가 연합해 함께 항일합시다!"

그러나 친일파는 냉정했다. 딸의 외침을 외면하고 사격을 명령했다. 항일군도 대응에 나섰고, 결과는 자위단의 패배였다.

위의 방미화·현청하 논문에도 언급됐듯이, 여성들이 항일에 나선 것은 민족해방과 함께 여성해방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들의 항일 현장에서는 여성해방이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 많았다.

위 논문은 "실전에 참여한 여전사들도 전투가 끝난 뒤 남성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쉬지 않고 작식(作食)대원을 도와 식량을 장만하고 끼니를 해결하는 일,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는 일들을 자각적으로 찾아 했다"라고 말한다. 자각적으로 했다지만, 남자 대원들이 이를 당연시하며 얼른 나서지 않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볼 수 있다.

허성숙도 그런 봉건적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관총을 들고 최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한 그는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밥을 하거나 세탁하는 일도 함께 담당했다. 허성숙이 겪은 이런 모순이 해결됐다면,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무장투쟁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워진 1020 여성들의 투쟁

일본군이 할힌골강을 건너는 모습.위키미디어 공용

허성숙이 순국한 때는 1939년 8월이다. 그가 24세 때 맞이한 마지막 싸움인 할힌골 전투(노몬한전투) 지원작전은 일제가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만 진군하다가 1945년에 패망한 이유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몽골-만주 접경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사상자 1만 6343명과 실종자 1021명이라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미국 역사학자 앨빈 쿡스는 이 사건을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평했다. 2009년에 <만주연구> 제9집에 실린 한석정 동아대 교수의 '러일·만몽·몽몽의 대결 - 노몬한(할힌골) 전투 70주년 기념 학회 참관기'는 앨빈 쿡스의 평가를 이렇게 소개한다.

"노몬한의 패전으로 인한 대(對)러시아 공포로 일본은 1941년 파시스트 동맹인 독일군의 러시아 공격에 동참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독일의 요구에 응해 러시아를 동쪽에서 침공했더라면 소련은 두 전선을 지탱할 수 없어 붕괴, 전후 냉전시대에 거대한 사회주의진영을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결국 일본은 소련과의 대결인 북방노선을 폐기하고, 자신의 패망을 초래할 운명적인 남진을 감행하였다."

할힌골 전투를 위한 적 후방 교란작전 중에 허성숙은 연로한 전우를 돕고자 자기 순번이 아닌데도 초소에 나갔다가 희생을 당했다. 초소에서 적들을 발견한 그는 상부에 보고하라며 전우를 먼저 보낸 뒤 홀로 적군을 상대하다가 붙들려 순국했다.

허성숙은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일본군의 북진을 막은 할힌골전투에 기여했다. 할힌골 전투로 인해 북진이 막힌 일본군은 미국과 남태평양 쪽에만 집중했다. 이는 일본이 소련을 견제할 기회를 잃고 미국을 계속 자극하다가 패망에 이르는 원인이 됐다.

허성숙은 앨빈 쿡스가 '세계사의 전환점'으로 평한 할힌골 전투로 인해 24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희생은 항일투쟁 중에 쓰러졌지만 오늘날 거의 기억되지 않는 1020 여성들의 희생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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