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9 10:49최종 업데이트 25.02.0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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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해안은 내 여행길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매혹이다. 거제도도 그 가운데 하나다. 계절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여행객의 감상이 육지와 섬과 갯가를 가득 채운다. 시인 이진우가 편지를 보내오던 저구마을이며 신선대의 출중한 절경이며 매물도 쪽으로 뻗은 바위섬까지, 잊을 수 없는 풍광들이다. 파도가 쓸어내리면 몽돌이 찰그락거리는 해수욕장과 달이 지나간 창밖으로 해가 뜨는 중턱의 마을까지.

그렇게 아름답고 포근한 풍광이지만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으로 보면 뿌듯하고도 우울한 기억이 곳곳에서 교차한다. 이순신이 승리한 옥포해전 기념탑에서 탁 트인 바다 전망을 만끽하는가 하면, 원균의 조선 수군이 폭삭 가라앉은 칠천량 해전의 현장에서는 통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거제도에 다리 하나로 연결된 통영은 한국 해병대의 최초 상륙지이고 전승기념탑도 있지만, 거제도 중앙에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8887㎡나 되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는 우리의 아픈 한국전쟁 현대사를 보여주고 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있는 조형물.윤태옥

유적공원 안에는 역사관은 물론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체험시설이 있어 거제도를 찾은 여행객들이 한 번씩 둘러볼 만하다. 수용소를 가득 채우고도 넘쳤던 전쟁포로들, 송환을 둘러싼 소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과 충돌, 종내에는 수용소장까지 인질로 잡은 포로들의 전쟁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많은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포로는 아군에게는 적군에 대한 중요 정보원이자 대외적으로는 아군의 승리를 과시하는 중요한 전과물이다. 반대로 적군에게 잡힌 아군 포로는 전장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구해오거나 아니면 훗날 현금다발을 안겨서라도 송환해 와야 한다. 아군 병사일 때보다 포로일 때 몸값이 높아졌다고 해야 할까. 적에게 수습된 시신으로서의 포로라도 그렇다. 국가가 국민을 끝까지 보호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전쟁의 한 섹션이다.

포로는 한국전쟁에서도 발생했지만, 2년이나 걸린 휴전협상 기간의 반을 독차지한 최대·최악의 난제였다. 포로와 포로교환을 들여다보면 복합골절과도 같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반영으로 드러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에 주저앉을 정도다.

한국전쟁 최악의 난제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전시된 사진. 태극기 문신을 한 북한군 반공포로.윤태옥

개전 초기에 인민군에 끌려간 남한 출신 의용군은 살아서는 적군이고 잡혀서는 포로인가. 그들이 사선을 넘어 탈출해 오면 이들은 자유의 용사인가 그래도 인민군 포로인가. 포로라고 하면 제네바 협약에 따라 그가 속했던 군대로 돌려보내야 하는가. 아군이 포로가 돼 아군의 동태를 적군에게 발설하거나 적군에게 순응하는 언행을 하다가 송환돼 오면 친공이나 용공이니 하며 처벌할 것인가. 그런 게 무서워서 저쪽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포로는 또 어찌할 것인가.

아군 병사가 포로가 됐다가 적군이 주는 밥을 먹다가 변심했다고 적이 말하면, 아군은 면담 한번도 없이 그를 군적이나 국적에서 이탈시켜야 할까. 정전협정에 서명한 일방이 유엔군 사령관인데 유엔은 한국전쟁의 당사자인가, 아니면 중립적인 국제기구인가. 중국인이 정규군도 아닌 자발적인 의용군으로 참전했다더니 자기네 나라로 가지 않겠다고 해도 포로는 포로니까 강제로 보낼 것인가. 강제로 보내지 않으면 중국의 적국인 장제스의 타이완으로 보내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아군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숱하게 이야기하던 제네바 협정을 우리가 슬그머니 위반하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북으로 끌고 간 민간인은 군인포로가 아니니까 휴전협상의 포로 문제에서 제외해야 하는가.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전선의 마을들을 강제소거를 해서 생긴 실향사민(失鄕私民)은 피난민인가, 아니면 유엔군이 납치한 민간인인가.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피난민인가 귀순자들인가.

전쟁통에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다가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민간인과 여자들은 정말 포로인가. 포로협상 전에 강압이든 자발적이든 적군에 입대한 아군 포로들은 아직도 아군인 포로인가 아니면 이미 나라를 배신한 적군인가. 아군 포로 100명을 데려오기 위해 적군 포로 1000명을 보내면 손해를 본 것인가 아니면 아군 포로를 송환해 오기 위한 최선의 방책인가.

어느 질문 하나 간명하게 답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이게 좋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도 유사한 경우가 있고, 이것을 승자도 패자도 아닌 합의로 처리해야 한다면 더 복잡하다. 한국전쟁의 포로협상이 그랬다. 결국 송환할 수 있는 포로에 대해서만 합의했고, 합의된 부분만 송환했다. 나머지는 일방적으로 석방하든 석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든 그렇게 끝냈다. 물론 이에 대한 상대방의 비난에는 귀를 닫고서 말이다.

이렇게 어긋난 과정 속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문제들은 전쟁 후의 갈등과 충돌로 이어졌다. 포로교환은 협상 테이블뿐 아니라 수용소 안팎과 국제정치 무대로 번져나간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일방의 항복으로 끝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선 전쟁에서는, 전장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에서 얻기는 불가능했다. 그것이 영토든 영해든 포로든.

또 하나의 전쟁

1951.5. 7. 거제 포로수용소 전경.박도/NARA

앞의 글에 이어가자면, 1951년 11월 27일 합의하고 가조인을 했던 2번 의제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 대해 30일 동안만 유효하다는 꼬리를 붙인 것은, 나머지 3, 4, 5번 의제를 30일이면 합의할 수 있고, 그렇게 하자는 취지가 들어 있었다. 휴전협상에서 4번 의제 포로, 그것도 송환의 원칙 하나만 남겨둔 1952년 5월만 하더라도 이 문제가 한국전쟁을 1년 2개월이나 더 질질 끌고 다니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 미국은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에 이미 서명한 나라이고, 유엔군은 국제적십자사에 포로 현황을 충실하게 보고해 왔다. 북한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한다고 선언한 바가 있고 개전 초기 국제적십자사에 포로 숫자를 보고한 적도 있었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누가 봐도 간명하다.

일단 포로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양측이 국제사회에 공개한 포로 숫자가 있다. 중국측은 전쟁 개시 첫 9개월 동안 6만5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다. 유엔군은 그동안 포로명부를 충실하게 국제적십자사에 보고해 왔는데 1951년 6월 8일까지 누계 15만476명이었다.

그런데 양측은 포로협상 출발점에서부터 속내가 달랐다. 미국은 유엔군 포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확실하게 송환해 오기 위해 포로를 머릿수에 맞춰 일대일로 교환하자는 생각이었다. 중국측은 포로 전체의 맞교환이었다.

협상이 시작되자 중국측은 제네바 협약을 근거로 해 '모든 포로는 휴전조인 후 즉시 석방해야 한다'는 원칙부터 합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원칙 문제를 뒤로 미루고 포로명단 교환과 국제적십자사의 포로수용소 방문과 같은 기술적 문제에 먼저 착수하자고 제의했다. 중국측이 양보하여 12월 18일 포로명단을 교환했다.

교환한 명단에 의하면 중국측의 유엔군 포로는 1만1559명이었고 미국이 넘긴 포로명단은 13만2474명이었다. 양측 모두 상대방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중국측은 국제적십자사의 숫자를 근거로 해서 4만4000여 명 이상의 포로를 누락시켰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유엔군은 포로조사를 통해 남한 출신 3만7000명을 전쟁포로가 아닌 민간인으로 분류해 명단에서 제외했다고 해명했다.

1951. 북한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들박도/NARA

미국은 중국측이 제시한 포로숫자는 경악할 수준이었다. 유엔군에서 실종자로 파악한 숫자는 한국군 8만8000명, 미군 1만1500명에 영국군과 터키군 실종자만 합해도 10만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전사했다고 하더라도 최소 7만5000명 이상을 기대했었는데 겨우 1만이라니. 미국은 최소 5만여 명의 포로를 누락시켰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중국측은 포로가 도망가거나 유엔군 폭격으로 사망하거나 혹은 전선에서 석방해서 귀향시켰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중국측이 해명하면서 일부 한국인 포로는 인민군에 지원자로 입대시켰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미국은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군 포로에게 고향으로 돌아갈지 인민군에 입대할지 선택할 기회를 줬으니, 유엔군도 중국측 포로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는 소위 자원송환 원칙을 제기한 것이다. 포로의 일대일 교환인가 집단교환인가 하는 원칙에 추가하여, 미국의 자원송환과 중국측의 강제송환이 원칙상의 문제로 충돌했다.

협상은 원칙의 문제에 치열한 설전을 벌였지만 속내는 포로의 숫자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용하기엔 숫자의 차이가 극심했다. 이즈음 한국 정부가 5000여 명의 납북된 저명인사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은 이 문제를 휴전협상의 의제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군 장교를 철수하겠다고 미국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미국은 포로협상에 납북 민간인들을 결부시키고, 자원송환 원칙에 따라 포로와 민간인을 합쳐서 일대일로 포로와 민간인 전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핵심은 유엔군이 돌려보낼 포로가 훨씬 많으니 그 차이만큼 북으로 끌려간 남한의 민간인들을 돌려받되, 송환을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1952년 1월 2일의 미국이 포로에 관해 처음 제안한 교환 방안이었다.

중국측은 "포로의 석방과 송환은 노예거래가 아니다"라며 일대일 교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강력하게 거부했다. 미국이 일부 수정해서 다시 제안했지만 "민간인을 데려오기 위해 포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측은 남한의 민간인을 납북했다는 주장에 맞서 유엔군이 후퇴할 때 강제로 소거한 것을 피난민 납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약 3000여 명의 유엔군 포로가 유엔군이 수용하고 있는 몇만 명의 중국측 포로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중요하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실향사민(私民)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면서 중국측이 일부 외국인을 돌려보내는 선에서 납북 민간인 문제를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납북 민간인 문제는 지금까지도 미해결 과제로 남은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송환의 원칙으로 좁혀졌다. 협상 전체로 보면 1952년 2월 3번 의제에서 남겨진 북한의 비행장 건설과 보수를 금지하고 중립국위원회에 소련을 넣겠다는 두 쟁점을 합쳐 세 개가 남았다. 미국으로서는 뭔가 확고하게 결정할 시점이 됐고 워싱턴에서는 강도 높은 토의가 벌어졌다.

자원송환은 애초에 미국이 구상한 우선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판문점의 포로 협상 이전에 미국 내부에서 의견을 조율하면서 자원송환이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원송환이 심리전에서는 유용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측이 아예 유엔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더 컸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유엔군 포로의 신속한 귀환이 우선이고, 자원송환은 제네바 협정에서 상반된다고 지적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역시 적군 포로는 유엔군 포로를 신속하게 송환받기 위한 교환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자원송환으로 입장을 변경했다. 대통령 트루먼은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포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어떠한 협정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다음 달인 1952년 3월 속개된 휴전회담에서 중국측은 일부 양보를 했다. 남한 출신 포로 1만6000명을 송환에서 제외하고 중국군 포로와 북한 출신 포로는 전원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미국도 일부 양보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4월 1일 참모장교회의에서 그동안의 일대일 교환 원칙을 철회하고 전체 포로를 교환하되 일부 양해사항을 두어 자원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 미국의 참모장교들이 중대한 실수를 했다. 송환할 포로가 대략 얼마나 되느냐는 중국측의 질문에 11만6000명이 될 것이라고 답을 한 것이다. 중국군과 북한 출신 포로 전원이 포함된 숫자였다. 그것은 송환 의사를 조사한 결과가 아닌, 단순히 남한 출신 포로를 뺀 숫자였다.

중국측은 포로 숫자에 만족한듯 유엔군이 포로를 심사하는 것까지 인정해 주었고, 양측은 포로의 숫자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2주간 휴회하기로 했다. 미국은 휴회하자마자 포로들의 송환의사를 심사했으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포로들을 실제로 조사한 결과 송환 희망자는 대략 7만 정도였다. 협상장에서 11만6000명이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7만이라니, 중국측이 정색하며 반발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미국은 4월 19일 재개된 참모장교회의에서 송환을 원하는 포로가 7만여 명이라고 중국측에 통보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중국측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기만이었다. 영국과 호주와 같은 참전국조차 대규모 송환거부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립국에 의한 재심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재심사를 하면 송환 거부자가 늘어날 것을 우려해 이 숫자가 최종적이라고 고수했다.

미국은 이때부터 회의를 비공개하면서 쟁점들을 일괄 타결하려고 시도했다. 미국은 북한의 비행장 규제를 포기하고 중국측은 중립국위원회에서 소련을 제외하는 것으로 양보했다. 그러나 자원송환 문제는 타결되지 않았다. 5월 6일 비공개회의가 공개로 전환되자마자 미국은 기다렸다는듯 "우리는 인간을 도살장으로 또는 노예로 넘기면서까지 휴전을 하지는 않겠다"며 중국측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의 내전-국제전이 아니라 미소 양대 진영의 체제대결이자 이념의 전쟁판이 됐다. 미국은 공산주의라면 조국이라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들을 강제로 송환하지 않는 자신들이 얼마나 인도주의적인지 전세계에 과시하게 됐다.

자존심과 명분 싸움 속에서 전역은 초토화

팔뚝에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한다고 문신을 새긴 포로들.박도/NARA

중국이 포로문제에 강경책으로 나간 속뜻은 중국군 포로의 전원송환이었다. 이것만 보장되면 북한 출신 포로들에게 자원송환을 적용하는 것도 양해하겠다는 의사를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해 미국 쪽에 전달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아니고 '의용'군을 파병했는데, 막상 포로가 되자 자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면 이들이 애초 의용이 아니고 강제였다고 폭로하는 셈이었다. 그것은 곧 냉전체제의 이념대결에서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 열등하다는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자존심과 명분에 커다란 상처가 될 일이었다.

한편 자원송환과 별개로 미국은 국제여론에서 계속 곤혹스러웠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됐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포로수용소에서 잔악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문서를 작성해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수용소장이 풀려난 뒤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했지만 포로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해 포로 가운데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실이 퍼져나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위에 중국측은 5월부터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유엔군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 도살장 운운한 미국으로서는 중국측이 미국의 일괄타결 최종 제안을 수용하거나 반대로 회담을 결렬시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은 포로들을 재심사했다. 6, 7월에 한 번씩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16만9938명의 포로 가운데 송환 희망자는 8만3071명, 불원자는 8만6867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4월에 제시한 7만여 명에 비해 20% 정도가 늘어난 것이다. 7월 15일 미국은 새로 집계된 이 숫자를 중국측에 제시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최후의 입장을 정리했다. 1952년 7월 "유엔군의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방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정하고 스탈린과 김일성을 설득했다. 미국의 포로 숫자가 맞지 않을 뿐더러 중국군 포로의 송환비율을 낮춰서 중국과 북한을 이간질하려는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이에 동조했고 김일성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삼국이 의견을 조율한 후에 열린 회담에서 중국은 미국의 7월 15일자 제안을 거절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수력발전소와 평양의 민간지역 폭격을 맹비난하면서 더욱 용감하게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미국도 중국측도 양보하지도 않고 결렬을 먼저 선언하지도 않고 시간만 흘렀다. 미국은 1952년 6~8월 사이에 자원송환 원칙을 기정사실화하고 중국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2만7504명의 민간인 억류자를 석방했다. 중국측은 강하게 비난했고 미국의 압박은 압박으로 먹혀들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미국과 길게는 2~3년 더 전쟁이 지속될 것으로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인명손실 이외에 더 잃을 것이 없다"는 끔찍한 언사로 중국을 지지했다. 전역이 폭격으로 초토화되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은 정전이 시급했으나 강경한 중국과 이를 지지하는 소련을 어쩌지 못했다.

포로 문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미국 국방부와 합참에서서는 확전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미국이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맞물리면서 반전여론이 확산되고 있어 확전을 선택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포로 문제를 양보하면 이데올로기적인 패배로 간주되는 유화정책이라고 비난받을 형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 트루먼의 인기는 떨어지고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위험은 커졌다. 트루먼은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기는 했지만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진퇴양난을 더욱 가속화한 것은 전투계속의 원칙에 의한 미군의 공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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