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북한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들
박도/NARA
미국은 중국측이 제시한 포로숫자는 경악할 수준이었다. 유엔군에서 실종자로 파악한 숫자는 한국군 8만8000명, 미군 1만1500명에 영국군과 터키군 실종자만 합해도 10만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전사했다고 하더라도 최소 7만5000명 이상을 기대했었는데 겨우 1만이라니. 미국은 최소 5만여 명의 포로를 누락시켰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중국측은 포로가 도망가거나 유엔군 폭격으로 사망하거나 혹은 전선에서 석방해서 귀향시켰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중국측이 해명하면서 일부 한국인 포로는 인민군에 지원자로 입대시켰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미국은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군 포로에게 고향으로 돌아갈지 인민군에 입대할지 선택할 기회를 줬으니, 유엔군도 중국측 포로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는 소위 자원송환 원칙을 제기한 것이다. 포로의 일대일 교환인가 집단교환인가 하는 원칙에 추가하여, 미국의 자원송환과 중국측의 강제송환이 원칙상의 문제로 충돌했다.
협상은 원칙의 문제에 치열한 설전을 벌였지만 속내는 포로의 숫자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용하기엔 숫자의 차이가 극심했다. 이즈음 한국 정부가 5000여 명의 납북된 저명인사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은 이 문제를 휴전협상의 의제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군 장교를 철수하겠다고 미국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미국은 포로협상에 납북 민간인들을 결부시키고, 자원송환 원칙에 따라 포로와 민간인을 합쳐서 일대일로 포로와 민간인 전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핵심은 유엔군이 돌려보낼 포로가 훨씬 많으니 그 차이만큼 북으로 끌려간 남한의 민간인들을 돌려받되, 송환을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1952년 1월 2일의 미국이 포로에 관해 처음 제안한 교환 방안이었다.
중국측은 "포로의 석방과 송환은 노예거래가 아니다"라며 일대일 교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강력하게 거부했다. 미국이 일부 수정해서 다시 제안했지만 "민간인을 데려오기 위해 포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측은 남한의 민간인을 납북했다는 주장에 맞서 유엔군이 후퇴할 때 강제로 소거한 것을 피난민 납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약 3000여 명의 유엔군 포로가 유엔군이 수용하고 있는 몇만 명의 중국측 포로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중요하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실향사민(私民)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면서 중국측이 일부 외국인을 돌려보내는 선에서 납북 민간인 문제를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납북 민간인 문제는 지금까지도 미해결 과제로 남은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송환의 원칙으로 좁혀졌다. 협상 전체로 보면 1952년 2월 3번 의제에서 남겨진 북한의 비행장 건설과 보수를 금지하고 중립국위원회에 소련을 넣겠다는 두 쟁점을 합쳐 세 개가 남았다. 미국으로서는 뭔가 확고하게 결정할 시점이 됐고 워싱턴에서는 강도 높은 토의가 벌어졌다.
자원송환은 애초에 미국이 구상한 우선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판문점의 포로 협상 이전에 미국 내부에서 의견을 조율하면서 자원송환이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원송환이 심리전에서는 유용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측이 아예 유엔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더 컸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유엔군 포로의 신속한 귀환이 우선이고, 자원송환은 제네바 협정에서 상반된다고 지적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역시 적군 포로는 유엔군 포로를 신속하게 송환받기 위한 교환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자원송환으로 입장을 변경했다. 대통령 트루먼은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포로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어떠한 협정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다음 달인 1952년 3월 속개된 휴전회담에서 중국측은 일부 양보를 했다. 남한 출신 포로 1만6000명을 송환에서 제외하고 중국군 포로와 북한 출신 포로는 전원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미국도 일부 양보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4월 1일 참모장교회의에서 그동안의 일대일 교환 원칙을 철회하고 전체 포로를 교환하되 일부 양해사항을 두어 자원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 미국의 참모장교들이 중대한 실수를 했다. 송환할 포로가 대략 얼마나 되느냐는 중국측의 질문에 11만6000명이 될 것이라고 답을 한 것이다. 중국군과 북한 출신 포로 전원이 포함된 숫자였다. 그것은 송환 의사를 조사한 결과가 아닌, 단순히 남한 출신 포로를 뺀 숫자였다.
중국측은 포로 숫자에 만족한듯 유엔군이 포로를 심사하는 것까지 인정해 주었고, 양측은 포로의 숫자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2주간 휴회하기로 했다. 미국은 휴회하자마자 포로들의 송환의사를 심사했으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포로들을 실제로 조사한 결과 송환 희망자는 대략 7만 정도였다. 협상장에서 11만6000명이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7만이라니, 중국측이 정색하며 반발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미국은 4월 19일 재개된 참모장교회의에서 송환을 원하는 포로가 7만여 명이라고 중국측에 통보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중국측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기만이었다. 영국과 호주와 같은 참전국조차 대규모 송환거부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립국에 의한 재심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재심사를 하면 송환 거부자가 늘어날 것을 우려해 이 숫자가 최종적이라고 고수했다.
미국은 이때부터 회의를 비공개하면서 쟁점들을 일괄 타결하려고 시도했다. 미국은 북한의 비행장 규제를 포기하고 중국측은 중립국위원회에서 소련을 제외하는 것으로 양보했다. 그러나 자원송환 문제는 타결되지 않았다. 5월 6일 비공개회의가 공개로 전환되자마자 미국은 기다렸다는듯 "우리는 인간을 도살장으로 또는 노예로 넘기면서까지 휴전을 하지는 않겠다"며 중국측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의 내전-국제전이 아니라 미소 양대 진영의 체제대결이자 이념의 전쟁판이 됐다. 미국은 공산주의라면 조국이라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들을 강제로 송환하지 않는 자신들이 얼마나 인도주의적인지 전세계에 과시하게 됐다.
자존심과 명분 싸움 속에서 전역은 초토화

▲팔뚝에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한다고 문신을 새긴 포로들.
박도/NARA
중국이 포로문제에 강경책으로 나간 속뜻은 중국군 포로의 전원송환이었다. 이것만 보장되면 북한 출신 포로들에게 자원송환을 적용하는 것도 양해하겠다는 의사를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해 미국 쪽에 전달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이 아니고 '의용'군을 파병했는데, 막상 포로가 되자 자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면 이들이 애초 의용이 아니고 강제였다고 폭로하는 셈이었다. 그것은 곧 냉전체제의 이념대결에서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 열등하다는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자존심과 명분에 커다란 상처가 될 일이었다.
한편 자원송환과 별개로 미국은 국제여론에서 계속 곤혹스러웠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됐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포로수용소에서 잔악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문서를 작성해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수용소장이 풀려난 뒤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했지만 포로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해 포로 가운데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실이 퍼져나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위에 중국측은 5월부터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유엔군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 도살장 운운한 미국으로서는 중국측이 미국의 일괄타결 최종 제안을 수용하거나 반대로 회담을 결렬시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은 포로들을 재심사했다. 6, 7월에 한 번씩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16만9938명의 포로 가운데 송환 희망자는 8만3071명, 불원자는 8만6867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4월에 제시한 7만여 명에 비해 20% 정도가 늘어난 것이다. 7월 15일 미국은 새로 집계된 이 숫자를 중국측에 제시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최후의 입장을 정리했다. 1952년 7월 "유엔군의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방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정하고 스탈린과 김일성을 설득했다. 미국의 포로 숫자가 맞지 않을 뿐더러 중국군 포로의 송환비율을 낮춰서 중국과 북한을 이간질하려는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이에 동조했고 김일성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삼국이 의견을 조율한 후에 열린 회담에서 중국은 미국의 7월 15일자 제안을 거절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수력발전소와 평양의 민간지역 폭격을 맹비난하면서 더욱 용감하게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미국도 중국측도 양보하지도 않고 결렬을 먼저 선언하지도 않고 시간만 흘렀다. 미국은 1952년 6~8월 사이에 자원송환 원칙을 기정사실화하고 중국측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2만7504명의 민간인 억류자를 석방했다. 중국측은 강하게 비난했고 미국의 압박은 압박으로 먹혀들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미국과 길게는 2~3년 더 전쟁이 지속될 것으로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인명손실 이외에 더 잃을 것이 없다"는 끔찍한 언사로 중국을 지지했다. 전역이 폭격으로 초토화되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은 정전이 시급했으나 강경한 중국과 이를 지지하는 소련을 어쩌지 못했다.
포로 문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미국 국방부와 합참에서서는 확전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미국이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맞물리면서 반전여론이 확산되고 있어 확전을 선택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포로 문제를 양보하면 이데올로기적인 패배로 간주되는 유화정책이라고 비난받을 형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 트루먼의 인기는 떨어지고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위험은 커졌다. 트루먼은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기는 했지만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진퇴양난을 더욱 가속화한 것은 전투계속의 원칙에 의한 미군의 공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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