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 7. 9. 시카고 일리노이 주, 한국전쟁 정전을 대통령 선거 공약에 내세운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 앞서고 있다.
NARA/박도
1953년이 되면서 한국전쟁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소련은 3월 5일 한국전쟁의 배후였던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해 말렌코프 등의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섰다.
미국은 1952년 겨울 국방부와 합참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확전을 신중하게 검토했지만 추진력이 약했고, 오히려 휴전으로 가는 추동력이 강해졌다. 공화당의 아이젠하워는 당선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는 전쟁의 종결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두 가지 수단을 채택했다. 첫 번째는 중국측으로 하여금 미국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믿게 해 굴복시킨다는, 일종의 심리전이다. 두 번째는 그게 실패하는 경우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해서 교착상태를 타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군사작전은 난점이 많았다. 재래식 전투로는 피해가 너무 커지고, 만주 폭격, 해안봉쇄 등으로 전쟁을 확대하는 것은 동맹국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고 소련의 참전을 야기할 우려가 있었다.
1953년 2월 2일 아이젠하워는 취임 후 첫 연두교서에서 타이완 해협의 중립화를 취소하고, 타이완의 중국 본토 공격을 막아왔던 조치를 해제하며, 한국전쟁에 관련하여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날 유엔의 참전 15개국 대표와 중국 해안을 봉쇄하려던 계획은 영국과 이탈리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스탈린은 새로 취임한 아이젠하워를 향해 한국전쟁을 종결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미국은 스탈린의 발언이 미국의 포로송환 원칙에 동의하는 것으로는 간주하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의 미국 새 정부가 4월 8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정책은 제한전을 유지하고 폭격에 의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전과 동일해 보이지만 달라진 것은 폭격 목표를 확대한 것이다. 폭격을 북한 지역으로 국한하되 광산 수력발전소 보급창고 군사기지 등 기존의 전략적 목표 이외에 관개용 댐과 모든 도시를 폭격 대상으로 확대했다. 몇천 명의 유엔군 포로를 조속히 송환해 오기 위해 수만 명의 중국측 포로를 내줄 뿐 아니라 그 10배에 달할 수도 있는 북한 민간인까지 죽이겠다는 방책이었다.
포로협상의 실마리는 전쟁 당사자가 아닌 인도적인 국제기구에서 나왔다. 적십자연맹 집행위원회는 1952년 12월 제네바에서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대로 '최소한의 선의'로 상병포로들을 즉각 송환하라고 촉구했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본국에 상병포로 교환제의를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 결의안이 1953년 2월의 유엔총회에 제출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자신들이 앞서서 상병포로 교환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제사회 여론에 떠밀린 것이다.
미국은 2월 22일 상병포로를 우선 교환할 의사가 있다는 서한을 판문점을 통해 중국측에 전달했다. 중국측은 미국이 협상재개 의사는 있다고 판단은 했으나 미국의 의사가 더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때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했다. 저우언라이 등 중국 조문단은 3월 7일 소련의 새 지도부인 말렌코프 몰로토프 흐루쇼프와 한국전쟁 문제를 토의했다. 소련은 스탈린 사후의 내부문제가 최우선이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장례식 직후 3월 19일 각료회의를 열고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문제를 재검토하고 휴전회담을 재개하기로 했다.
소련이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자 그에 따른 일련의 조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측은 3월 28일 상병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회신을 미국에 보냈다. 곧이어 중국 저우언라이가 유엔총회에 제출된 인도의 중재안과 유사한 포로교환을 제안했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를 전부 교환하고,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인도한다는 것이다.
4월 6일 양측의 상병포로 교환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상병포로 교환을 위한 협정문 작성에는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국측에서 송환할 상병포로는 600여 명, 유엔군이 5800여 명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지만 이번에는 회담을 진행시켰다. 4월 11일 교환협정에 조인하고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판문점에서 상병포로를 교환했다. 처음 제시한 숫자보다 조금씩 늘어서 미국이 6670명을, 중국측이 684명을 송환했다.
급진전되는 휴전협상과 반대하는 이승만

▲1953. 4. 11. 유엔군 측 대표 미 해군 다니엘 제독이 부상자 환자 포로 교환 합의문을 보이면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NARA/박도
이와 함께 휴전회담도 급진전했다. 1952년 10월 미국이 뮤기휴회를 선언한 시점에서 남은 쟁점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처리 하나뿐이었다. 휴전을 원하는 것은 소련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정권이 교체되면서 휴전으로 기울어버린 여론을 좇지 않을 수 없는 대통령이 취임했고, 군사적인 면에서도 중국군이 강화돼 더 이상 양보를 기대하기도 어렵게 됐다. 미군 폭격으로 쑥대밭이 돼버린 북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 역시 중국군 포로의 송환 숫자만 어느 정도 확보되면 서둘러 휴전해야 할 사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국만 달랐다. 대통령인 이승만은 전쟁수행 능력이 없고 국민들이 전쟁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전협상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1953년 4월 26일 본회담이 재개됐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처리방안이 집중적으로 토의됐다. 중립국으로 이관하는 절차, 중립국의 선정, 수용소의 위치, 보호기간과 설득기간, 중립국 보호기간이 끝난 뒤에 송환거부 포로들의 처리 문제 등이었다. 중국측이 5월 7일 기존의 입장에서 진일보한 양보안을 제시하자 미국은 이것을 기초로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몇몇 쟁점에서는 진전이 없었다. 5월 13일 일부 대안이 오갔으나 논쟁이 길어졌다. 미국은 5월 25일까지 휴회를 하고는 다시 군사적인 압박을 가했다. 5월 13일 평양 북쪽의 덕산댐 폭격부터 시작해 열흘간 세 개의 댐을 폭격했다. 미국은 중국군 인민군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처리를 위해 민간인과 시설에 대한 비인도적인 폭격을 계속하는 모순을 되풀이했다.
5월 25일 미국은 비공개 회의를 열고 그동안 준비했던 최종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이때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최종안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 대표단에 옵서버로 참관하고 있던 최덕신은 회담 참석을 거부하고, 이승만은 중국군과 유엔군이 동시에 철수하는 독자적인 휴전방안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송환포로 문제는 자신이 반공포로들을 곧 석방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 이 반공포로 석방 발언은 주목받지는 못했다.
중국측은 미국의 최종안에 대해 북한 소련과 조율했다. 6월 4일 회의에서 중국측은 미국의 최종안을 거의 수용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미국 정부는 중국측이 제시한 방안을 휴전의 기초로 삼는다고 대표단에게 승인했다.
마침내 6월 8일 제146차 본회의에서 중립국 송환위원회 관련 협정과 최종 포로송환 협정이 조인되었다. 마지막 쟁점은 포로송환 60일 이후에도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이관하여 90일 동안 양측에서 송환에 대해 해설하고, 그 이후에도 거부하면 정치회담으로 넘기고, 정치회담에 넘어온 지 30일이 되면 그대로 석방하는 것으로 합의한 것이다.
▲1953. 8. 6.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 포로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NARA/박도
▲1953. 8. 17.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으로 유엔군(미군) 포로가 돌아오고 있다.
NARA/박도
드디어 한국전쟁을 1년 넘게 질질 끌고 다닌 포로협상이 마무리됐다. 회담을 개시하면서 정한 다섯 개의 의제가 개별적으로는 전부 합의된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군사분계선을 다시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측은 마지막으로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해서 복잡해질 수 있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참모장교들은 양측이 점령한 진지를 일일이 확인하며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합의했다.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2킬로미터씩 후퇴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면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도 합의했다. 새로운 군사분계선은 6월 17일 본회의가 승인했다.
정전협정 전체가 합의됐고 이제는 조인식만 남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야 끝나는 것이었다. 아직 마지막 갈등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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