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호서명현 초상화 특별전'에 소개된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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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중앙군 확충과 북벌정책을 놓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효종 임금이 그해 6월 23일(음력 5.4) 마흔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촉발됐다. 효종의 새어머니인 35세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죽은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3년복을 입어야 한다',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립이 이로써 발생했다.
논쟁의 물꼬를 튼 남인당의 윤휴는 당나라 학자 가공언의 <의례의소>를 내세웠다. 예법 해설서인 이 책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정실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을 세워 장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라고 말한다. 효종이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를 뒤이어 장자가 되고 왕위를 이었으므로 장자인 효종을 잃은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게 윤휴의 주장이다.
효종의 중앙군 확충과 북벌 의지를 반대했던 서인당 영수 송시열은 효종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장자가 죽더라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예외를 <의례의소>에서 찾고자 했다. 이 책은 '아버지를 계승(體)하기는 했지만(而) 적통이 아닌(不正) 아들이 죽으면 그 아들을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라며 예외를 인정한다. 송시열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의 논리를 이용해 '효종이 인조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통이 아니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송시열의 말은 거짓이었다. 효종은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통이었다. 체이부정의 부정(不正)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자녀를 지칭했다. 효종은 후궁의 아들이 아니므로 '부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효종을 서자로 간주하고 1년복을 주장했다. 이런 억지를 부려도 될 만큼 보수세력이 막강했음을 방증하는 장면이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폄하하는 송시열의 논리가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 18세의 신왕(新王)인 현종은 막강한 서인당을 어쩌지 못했다. 그는 서인당의 논리를 받아들여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은 뒤에도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이 논쟁은 전국적 대결 양상을 띠며 무려 7년간 이어졌다. 상황이 길어지자 현종은 1666년 4월 28일(음력 3.25)에 논쟁을 종식시켰다. 상복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자는 형벌을 가하겠다는 왕명을 내렸다. 아버지의 위상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 현종에게도 부담이 됐던 것이다.
제2차 예송논쟁은 제1차로부터 15년 뒤인 1674년에 일어났다. 그해 3월 29일(음력 2.23)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논란이 됐다. 원래대로라면 제2차 논쟁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더는 논쟁하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송 논쟁이 또다시 터진 것은 집권 서인당의 실수 때문이다.
자의대비는 며느리가 죽은 지 닷새 뒤인 4월 3일부터 상복을 입기로 돼 있었다. 서인당은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는 방침을 4월 1일에 확정했다. 그랬다가 바로 다음 날 이를 취소하고 9개월복으로 변경했다.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예전(禮典) 편은 맏며느리가 죽으면 1년복을 입고 그 이외의 며느리가 죽으면 9개월복을 입도록 규정했다. 서인당이 무심코 내린 4월 1일자 결정은 인선왕후를 자의대비의 맏며느리로 인정하는 것이자 인선왕후의 남편인 효종을 자의대비와 인조의 장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인당 당론을 스스로 뒤엎는 일이었다. 음력으로 현종 15년 2월 27일자(양력 1674.4.2) <현종실록>에 따르면, 주무 부서인 예조는 "다급한 사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해 이처럼 경솔하게 잘못된 결정을 했으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라고 사죄했다. 현종은 "알았다"고 답했고, 자의대비는 9개월복을 입었다.
이렇게 지나가는 듯했던 4월 1일의 실수를 뒤늦게 문제 삼은 인물이 있었다. 더 이상 거론 말라는 왕명을 무시하고 상소문을 올린 뜻밖의 선비였다. 70세의 재야 학자인 도신징(都愼徵, 1604~1678년)이 그 주인공다. 야당 지역인 대구에 사는 남인당 출신의 학자였다.
현종 15년 7월 6일 자(양력 1674.8.7) <현종실록>에 따르면, 도신징은 서인당 정권이 하루 사이에 입장을 바꾼 것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현종의 자존심을 자극할 만한 말을 했다. "대통을 계승하신 분은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는 법이거늘 그런데도 적장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까?"라는 말이었다. '효종이 인조를 계승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됐는데도 적장자가 아니냐'는 이 물음은 '효종을 계승한 현종이 정통성 없는 임금이라는 말이냐'라는 이의제기를 내포했다.
도신징의 상소는 이때까지 예송논쟁에 소극적이던 현종을 일거에 바꿔놓았다. 현종은 '더 이상 거론 말라'는 판례를 뒤집고 논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상소가 올라온 지 8일 뒤인 8월 15일(음력 7.14),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인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대신들을 모아놓고 서인당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했다. 군주의 태도 변화 앞에서 서인당 인사들은 당황했고, 그런 그들을 상대로 압박을 강화한 현종은 다음날부터 서인당 사람들을 하나둘씩 투옥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서인당이 제1차 때 승리한 것은 논리가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 현종이 논리를 앞세워 몰아붙이자 서인당은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현종은 그들을 보며 짜증과 노여움을 내면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상황을 이끌어갔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판례 변경'이다. 현종은 '인선왕후는 적장자의 부인'이라는 전제하에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도록 결정했다. 그는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임을 이런 방식으로 선포했다. 이는 '나는 적장자의 아들이다'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남인 세력의 성장, 현종·숙종의 결단

▲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 역할을 맡은 지진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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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를 뒤집은 현종은 이를 명분으로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효종의 정통성을 깎아내린 서인당을 주요 포스트에서 내몰고 그 자리에 남인당을 채웠다. 8월 27일(음력 7.26)에 남인당 허적을 영의정에 임명한 것이 상징적 인사 조치였다.
그러나 현종은 임무를 마치지 못했다. 서인당에서 남인당으로 바뀌는 정권교체가 마무리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허적을 임명하기 이틀 전부터 복통을 앓은 현종은 열이 오르고 헛배가 부르고 맑은 대변이 나오고 소변이 좋지 못한 증상을 보이다가 9월 17일(음 8.18)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효종이 적장자 위상을 갖도록 해놓고 향년 33세로 숨을 거둔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정계 개편을 마무리한 군주가 13세의 숙종이다. 1674년 9월 22일(음 8.23) 즉위한 그는 서인당 거물인 68세의 송시열을 이듬해 2월 7일 유배 보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어쩌지 못했던 보수파 거물을 어린 군주가 과감하게 귀양 보냈던 것이다. 그때까지 유배 한번 안 가고 편하게 정치했던 송시열은 이로써 생애 최초의 귀양을 가게 됐다.
1674년의 여야 정권교체는 광해군 실각 이후 51년 만의 역대급 사건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뒤 농민과 상인들의 진보적 기운을 억누르며 기득권 유지에 치중하던 서인당은 이로써 반세기 만에 야당이 됐다.
이 권력 교체가 오로지 현종의 판단과 숙종의 과감성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51년 기간의 후반부에 남인세력이 성장해 서인당을 대체할 만큼의 역량을 갖춘 것이 배경이 됐다. 서인당을 대체할 세력이 있었기에 현종이 과감히 '판례 변경'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인당의 구심적인 퇴계 이황이 경상도 안동에 근거지를 둔 데서 알 수 있듯이 남인당은 지금의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했다. 그런데 이 TK 세력만으로는 중부권의 서인당을 대적할 수 없었다. 51년 기간의 후반부에 서인당 세력권인 한양과 경기도 내에서 남인들이 세력화에 성공하고 이들이 경상도 남인당과 제휴한 것이 정권교체의 기반이 됐다.
남인당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인 1598년에 유성룡의 실각과 함께 정권을 잃었다. 판례 변경에 힘입어 이들은 76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현종의 판결은 서인당이 51년 만에 실권하고 남인당이 76년만에 재집권하게 만든 '희대의 판결'이다. 그 뒤 남인당은 역사 진보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런 세력의 재집권을 도왔다는 점에서, 1674년에 나온 '희대의 판결'은 역사 발전에 순기능을 했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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