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7 17:38최종 업데이트 25.05.0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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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심볼 마크와 기표용구연합=OGQ

우리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서로 보완적이며 조화로운 관계에 있다고 믿어왔다. 민주주의는 민의의 실현이고, 법치주의는 그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적 틀이며, 둘이 함께 작동할 때 건강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본질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본능을 가지며, 법치주의는 그 의지가 절차와 규범,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 속에서만 실현되어야 한다는 경계를 설정한다.


즉, 민주주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고, 법치주의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혹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따진다. 이때 긴장은 불가피하다. 민의는 절차의 제약을 거부하고 싶어 하고, 법은 때로 그 제약 자체를 자기 목적으로 삼으며 민의를 억압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란 바로 이 긴장을 조율하는 공간이다. 민의가 절차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표현되고, 법이 민의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경계선과 접촉점을 조정하는 기능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란 단순한 '의사결정'이나 '통치 행위'가 아니다. 정치는 '어디까지 협조하고, 어디서부터 요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민의의 실천이며, 동시에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서부터 제한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법치의 실천이다.

이 긴장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다. 그는 <법의 정신>에서 "자유란 권력이 권력을 제한하는 데서 온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권력이 하나의 의지로 집중되는 순간 자유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의도 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고, 법도 민의에 의해 감시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균형추가 될 때, 비로소 정치적 자유는 실현될 수 있다.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에서 "법은 일반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이어야지,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선 안 된다"라고 경고한다. 법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국민의 의지를 억압하기 시작할 때, 그 체제는 더 이상 민주주의적 질서가 아니라 법의 탈을 쓴 관치 체제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없다. 현실 정치에서 이 둘은 언제나 부딪치고, 협상하며, 일정한 간격과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만 기능한다. 그 간격이 무너지면 독재가 되고, 줄이 끊기면 아노미가 된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시대의 정치 위기란 결국, 민의와 법치 사이의 긴장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법적 일탈은 단순한 절차 위반이나 법률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균형 구조를 무너뜨리는 권력적 일탈이며,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더 이상 민의에 기반한 정치가 아니라 비선출 엘리트의 법적 허구에 종속되는 정치로 전락하고 있다는 신호다.

정치는 단지 제도를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 본질은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사유와 실천의 연속이다. 그 점에서 우리가 오늘 한국의 사법 권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순간, 그 기준점은 단지 헌법 조항이나 판례가 아니라, 근대정치철학이 권력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자유에 대해 "권력이 남용되지 않게 하려면, 권력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의 구조 자체를 설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삼권분립이 단순한 기술적 설계가 아니라, 정치권력이 본질적으로 자기 과잉의 위험을 내포한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몽테스키외에게 자유란 권력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권력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2025년 마주한 '사법의 광기'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떠한가? 사법부는 입법·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은 견제받지 않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법에 따라 판단했을 뿐'이라는 말은 결국 '나는 스스로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일 수 있다. 몽테스키외의 말대로라면, 그 순간 법은 권력이 되고, 자유는 사라진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 논고>에서, 모든 정치적 정당성은 시민의 동의로부터 온다고 봤다. 왕도, 의회도, 법도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만, 제한된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의 사법부는 국민의 직접 선출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절제된 역할과 중립성을 통해 그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일부 사법 엘리트들은 자신이 민의보다 우위에 있고, 정치의 '심판자'가 아니라 '설계자'인 양 행동하고 있다. 시민들이 더 이상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로크는 "모든 권력은 시민의 동의에서 비롯되며, 이 동의가 철회되는 순간, 그 권력은 정당성을 상실한다"라고 말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법은 일반의지를 구체화하는 수단일 뿐이며, 그 법이 스스로 권력화될 경우, 민주주의는 독재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루소의 경고대로라면, "법의 이름으로 민의를 누르는 자는, 더 이상 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자유의 적이며, 권력의 사병에 불과"하고, "법이 자기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억압의 도구가 된다."

한국의 사법부는 과연 지금 국민의 일반의지를 반영하고 있는가? 그 법적 판단은 과연 공정한 절차와 공동체적 상식 속에 있는가? 아니면 법이라는 형식을 내세워,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철학자들이 경고한 바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법이 법을 넘어서고, 권력이 견제받지 않으며, 동의 없이 구성된 체계가 시민의 의지를 규정하고자 할 때, 민주주의는 말없이 무너진다. 이제 우리는 2025년 한국에서, 그 무너짐의 첫 증상을 '사법의 광기'라는 이름으로 마주하고 있다.

2025년 오늘의 한국에서, 사법 권력은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그동안 '법치주의'라는 이름 아래 정치로부터 스스로를 분리된 고결한 심판자로 규정해 온 사법 엘리트들은, 지금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검찰에 이어, 이제 그 균열의 중심에는 대법원이 있다.

5월 1일, 대법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해 2심 무죄 판결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는 단순한 판결이 아니라, 법적 형식을 앞세운 정치 개입의 선언이었다.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해석하는 정치적 의도다. 대법원은 사법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입법부의 다수 의지와 유권자의 선택, 그리고 민주적 절차를 유린했다.

민의의 판단을 '위법'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내리고, 엘리트적 해석권을 무기로 정치에 개입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판결을 넘어, 사법부가 민주주의 위에 서겠다는 선언이며, 소수의 자의적인 정치적 판단을 법의 이름으로 위장한 탈헌정 행위다.

사법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검찰과 대법원은 조직만 다를 뿐 같은 권력의 본능을 공유하고 있다. 법을 들고 있지만 권력을 향하고, 해석을 말하지만 판단을 독점하며, 스스로 제도의 바깥에서 모든 것을 심판하려 든다.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뜨린 대법원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준비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검찰이 그랬듯, 대법원 역시 책임 없는 권위를 누리고, 견제 없는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자신들이 쌓아 올린 법적 권위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리고 있다. 문제는 사람의 교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민주주의 바깥에 둔 채 감시받지 않으려는 구조적 태도다. 그 오만은 언제나 가장 먼저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검찰이 무너진 그 자리를, 이제는 대법원이 스스로 향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 몰락의 전조를 국민이 더 일찍, 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의 일탈과 권력 중독은 오랜 시간 누적되었고, 분노를 삭이며 이를 견뎌온 시민들은 이제 대법원이 같은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치고 있다.

그들은 법의 해석을 독점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착각한다. 민의는 미숙하고, 자신들은 판단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법복이 가리고 있는 것은 이성도 양심도 아닌,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외면한 채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자기 정당화의 태도일 뿐이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대법원은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뜨렸으며, 그 지적 수준만큼이나 그들의 권력 수준도 이제 재조정되어야 한다. 존중은 자리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가에 따라 그 존중은 유지되거나 폐기된다. 바로 그 점을 철학자들은 반복해서 경고해 온 것이다.

지금의 대법원은 존중 받을 권리를 상실했다. 그들의 말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 됐으며, 권력의 자기 과잉일 뿐이다. 시민은 더 이상 사법부의 권위를 당연하게 수용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들이 그 권위를 정당하게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지금, 정치적 무력화가 아닌, 도덕적 붕괴를 겪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의지를 심판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그 결과는 시민에 의한 사법부 심판이라는 반대의 결과를 보게 됨은 필연적이다. 그들의 판결은 그들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추락했는지를 증언하는 기록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민의는 대법원을 '사법의 현자'로, 진리의 해석자로, 마지막 권위의 상징으로 존중해왔다. 모든 권력 중 유일하게 권위주의적 복식 문화를 고수해 온 사법부는, 국가 질서를 수호하는 고귀한 책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스스로 법복을 찢고,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했으며, 사법의 경건함마저 허물어뜨렸다.

사법부 역시 '검증의 대상'

이제는 국민이 그들을 감시하고, 제어하고, 명령할 수밖에 없다.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이 선택은 시민에 의한 사법 통제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질서의 기초가 되며, 이미 많은 선진 법치국가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법 권력을 점진적으로 민의의 통제 아래 두는 방향으로 제도화해 왔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약 150명 이상의 판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연방사법장관, 16개 주 법무장관, 그리고 연방하원이 선출한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판사선출위원회에 의해 선출된다. 이후 연방대통령이 형식적으로 임명하지만, 입법부와 주 정부가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제도적 견제 구조를 갖춘다.

프랑스 대법원은 약 200명의 판사로 구성되며, 이들은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핵심 직위의 경우 반드시 '고등사법평의회(CSM)'의 제청을 거쳐야 한다. CSM은 판사, 검사뿐 아니라 국회의장이 지명한 외부 인사도 포함되어 있어, 사법부 인사가 특정 권력에 집중되지 않도록 정치적 균형과 민주적 정당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일본 대법원의 판사 수는 우리와 비슷한 15명이지만, 모든 대법관은 임명 후 처음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에서 반드시 국민의 '심사'를 받아야 하며, 이후에도 10년마다 국민 심사에 회부된다. 유권자는 각 판사에 대해 불신임할 수 있으며, 과반의 불신임이있을 경우 해당 판사는 해임된다.

한국 대법원은 14명으로 구성되며,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한 뒤 국회 표결을 거친다. 대법원장 후보 낙마 사례는 2회 뿐이다. 국민은 어떤 통제권도 갖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폐쇄적으로 자기 복제를 반복하는 구조이다.

이제 한국의 사법부 역시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적 능력이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 한, 그들의 모든 결정은 시민의 비판과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반격할 권리를 갖는다. 그 반격은 혼란이 아니라, 통제받지 않는 권력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회수하려는 시민의 합리적 대응이다.

5월 7일, 사법부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파기환송심 일정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명백히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판결에 쏟아진 거센 시민적 반발과 정치권의 비판 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법적 자정의 신호로 읽히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권력을 향한 법의 일탈은 이미 구조적이며, 사법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정당하지 않은 권력에 맞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자기방어이자 정치의 근본 윤리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대법원의 권력 일탈에 대해 시민은 더 이상 침묵해서도, "법에 맡기자"는 말로 책임을 미뤄서도 안 된다. 지금은 행동의 시점이다.

정치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의가 제도 안에 들어섰음에도, 시민이 여전히 그 제도에 예의를 갖추는 때다. 대법원이 국민 위에 군림하며, 법 해석이 민의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그 권위는 더 이상 민주주의 내부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이제 시민이 해야 할 일은 명료하다. 위선적 권위에 침묵하지 않는 것, 그 권위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그 권위를 민주주의의 윤리와 시민적 이성 앞에 세우는 것.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그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구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정당한 책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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