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0 06:57최종 업데이트 25.05.20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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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반도체 회사의 위치. 수도 KL에서 멀리 떨어진 페낭 주위에 많고, 바다 건너 쿠칭에도 반도체 팹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말레이시아 반도체 산업 협회 (MSIA)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에 따른 공급망 재편 속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선택한 곳이 말레이시아입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5위의 반도체 수출국이며 자국 수출의 약 40%를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반도체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입니다.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은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 생산된 반도체 웨이퍼를 수입해 테스트와 조립을 거쳐 수출하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체적으로 웨이퍼를 생산하는 팹도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반도체 회사들

독일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전력 반도체 시장 1위인 인피니온은 말레이시아 북부 도시 쿨림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 반도체 팹을 운영하고 있고, 같은 곳에 말레이시아의 파운드리 기업인 실테라가 있습니다. 동말레이시아의 쿠칭에는 독일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 X-FAB이 반도체 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굴지의 반도체 팹이 있다는 쿨림은 말레이시아에서 어디쯤 자리 잡고 있을까요?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근처가 아닙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쿨림까지 거리는 330km로 서울에서 광주보다 더 먼 곳에 있습니다. 인구도 34만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며 이웃한 도시 페낭의 인구 170만 명을 더해도 200만 명 겨우 넘습니다.

그래도 쿨림은 X-FAB이 있는 쿠칭에 비하면 쿠알라룸푸르에서 가까운 편입니다. 쿠칭은 동말레이시아의 사라왁에 있는 인구 40만 명의 작은 도시입니다. 쿠알라룸푸르와는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서 차로는 못 가고 비행기로 약 2시간을 가야 합니다. 사라왁의 인구까지 다 더해도 인구가 300만 명이 채 안 됩니다.

말레이시아 쿠칭에 있는 XFAB의 반도체 팹. 정글 한 가운데 팹이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24년에는 대규모 확장 공사를 하기도 했습니다.X-FAB

말레이시아는 왜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반도체 단지를 조성했을까요? 반도체 산업은 최첨단 산업이고 거기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최고의 인재들이어야 하는데, 수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반도체 팹을 지으면 어떻게 그런 인재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반도체 산업에 최첨단 기술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반도체 팹을 운영하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만 필요한 건 아닙니다. 반도체 팹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그 안에는 일정 수준의 기능과 기술로도 충분한 일이 있고, 세계 최고의 인재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건 반도체 산업만의 특징만도 아닙니다. 자동차 산업도 조선 산업도 바이오산업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말레이시아의 팹은 대부분 그 지역 출신을 직원으로 뽑고, 단순 작업을 하는 오퍼레이터의 경우에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온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험을 가진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면 좋은 조건을 내걸고 한국의 경력자를 채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구 34만 명의 쿨림이나 보르네오 섬에 동떨어져 있는 소도시 쿠칭에도 팹을 짓고 필요한 직원을 충원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인재 채용은 그렇다 치고 반도체 팹이 그런 외진 곳에 있으면 장비나 소재의 조달이나 협력업체의 지원을 받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운영을 위해서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반도체 팹이 하나 지어지면 거기에 장비와 부품, 소재를 공급하는, 이른바 소부장 업체들은 팹 근처에 지사를 내고 인원을 상주시킵니다. 팹은 문제없이 운영되고 그 지역에는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되는 겁니다.

대만 TSMC의 반도체 팹 위치. 반도체 팹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 군데 모아놓지 않습니다.TSMC

반도체 팹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짓는 건 말레이시아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의 TSMC가 팹을 짓고 있는 일본의 구마모토현은 도쿄에서 1000km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재굴기를 외치며 지원하는 라피더스 팹은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홋카이도에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반도체에 의지하고 있는 대만에서도 TSMC는 수도인 타이베이 근처인 신주부터 타이중, 타이난과 함께 타이베이에서 300km 넘게 떨어진 가오슝까지 팹을 분산시켜 놓았습니다.

우리는 왜 지방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못 만드나

세계 5대 반도체 생산 국가 가운데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모두 모아 놓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를 수도권이 아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방에 조성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일부 독자들은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지으면 젊은 인재들이 가려하지 않아서 팹 운영이 안 된다는 반응을 자주 보였습니다.

"업계에서는 평택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괜찮은 인재 수급이 어렵다는 게 정설처럼 이야기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MZ세대들이 월급 많이 주고 취직된다고 지방으로 갈 친구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외국 오래 계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지방 역시 발전된 외국의 케이스랑 서울 집중이 심각한 한국이랑은 상황이 달라요."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걸 서울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죠.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대기업 취직을 위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기 때문에 '남방한계선'을 판교나 천안, 평택 등으로 정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곳이 대전인데, 대전에 반도체 팹이 생긴다면 그곳이 지방이기 때문에 취직을 꺼리게 될까요? 대전 대신 부산, 광주, 대구, 강릉을 넣어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에도 대기업들이 이미 여러 생산 시설을 갖추고 그 지역 인력으로 아무 문제 없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기업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방의 인재들이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옮기는 겁니다.

울산의 자동차 공장, 거제의 조선소, 여수의 정유공장은 해당 지역의 인재로 운영이 가능한 상황에서 반도체 팹이라고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반도체 팹은 최첨단 시설이라 최고의 인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30년 넘게 반도체 현장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확언할 수 있는 건 반도체 팹에서 일하는 인재들이 자동차나 조선소, 정유공장의 인재들보다 특별히 더 나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반도체 팹을 운영하는 구성 인원을 보더라도 고졸 인력부터 전문 학사, 학사, 석사 이상이 고루 필요한데, 반도체 연구소가 아니라면 석박사급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이 학사 이하입니다.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지으면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지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지역 균형발전에도 맞고, 전기를 많이 쓰는 반도체 팹의 특성상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방이 입지적으로는 더 유리합니다.

서로 부딪히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5일 오전 전남 광양 전남드래곤즈 북문 광장 유세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이희훈

지난 15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전남 광양 유세에서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제품만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RE100 때문에라도 기업들이 재생에너지가 많은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세 가지 유인책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지방으로 가는 기업에 대규모 세제 혜택을 주자. 두 번째, 지방으로 가거나 지방에서 시작하는 기업들에는 땅과 관련된 특혜를 주고 웬만한 규제는 다 완화해 주자. 세 번째, 전기 생산지와 소비지 간의 전기 요금 차이를 확실하게 해서 기업들을 지방으로 유인해 지방 균형 발전을 이루자.'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재명 후보의 이 계획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지방 균형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용인에서 이재명 후보의 계획과 정반대 되는 거대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발표한 세계 최대의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 사업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수도권 공장총량제마저 무너뜨리며 용인에 반도체 팹을 건설하려는데, 거기에 반도체 특별법까지 만들어 세제 혜택을 주려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짓는데도 국민 세금으로 국가산단을 만들어 땅과 관련된 특혜를 주고 공공기관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및 각종 영향 평가 등에서 웬만한 규제는 다 풀어줬습니다. 세 번째, RE100에 해당하지 않는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공급하고, 향후 재생에너지는 송전선을 깔아 호남에서 끌어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것부터 원점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곳에 전기요금 등 각종 혜택을 통해 대기업을 유치하겠다는 이재명 후보의 계획에 가장 적합한 일은 반도체 팹의 호남 이전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할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재명 후보는 반도체 팹을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호남에 유치하는 대신 에너지 고속도로라는 이름의 송전 시설을 설치해 수도권에 전기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기업들을 지방으로 유인해서 지방 균형 발전을 이루자"라고 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권에 들어설 반도체 팹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재생에너지를 보낼 궁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수도권에 팹을 짓고 있는 재벌에 세제 혜택을 주려고 하는 반도체 특별법은 현재 민주당이 주도하고 있고, 이 역시 지방으로 가는 기업에 대규모 세제 혜택을 주자고 하는 이재명 후보의 약속과 부딪힙니다.

이재명 후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17일 광주 유세에서 이재명 후보는 "국가 정책을 수립할 때, 수도권과 지방을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라 '억강부약'(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움)의 정신으로 재정을 배분해서 지방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성장 발전하도록 만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권에 조성 중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는 대표적인 '억약부강' 정책입니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에 각종 특혜를 줘가며 대규모 투자와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지방균형발전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를 재생에너지 생산지인 지방에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용인에 조성 중인 시스템반도체클러스터용 국가산단은 아직 되돌릴 시간이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이 문제에 대해 재벌이나 토건 세력의 처지가 아니라 지역 균형발전을 원하는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 서서 깊이 고민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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