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바라본 6월 17일 거리. 중간에 전승탑이 가로막고 있지만 로터리를 지나 3킬로미터 서쪽으로 뻗는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De-okin
1953년 6월 15일 아침, 동베를린 중심가 라이프치히 거리의 병원 공사장 노동자들이 일제히 연장을 내려놓았다. 노동시간 10% 일괄 증가 명령이 내려진 지 2주일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정부 청사 앞까지 행진한 뒤 그 앞에서 노동시간의 원상복구와 임금 인상을 외쳤다. 그 외침을 들은 인근의 다른 공사장 노동자들도 와서 합류했다.
동독은 국가 설립 이래로 여러 문제와 싸웠다. 우선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점령국 소련에 높은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로 인해 경제가 말이 안 되게 침체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집권당이며 유일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은 1952년 당 총회를 소집했다. 거기서 소련 모델을 따른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의결했다. 동독이 출항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체계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큰형님이 먼저 간 길을 따르는 것이 안전해 보였을까?
모든 사업체의 국영화와 농업의 집단 농장화가 결정되고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와 나란히 서독과의 교류 단절도 시작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현저한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식량은 배급에 의존했다. 정부는 주민들의 복지보다는 군사력 확충과 중공업 신장을 우선시했다. 중공업을 키우기 위한 기본 시설이 거의 없던 상태였기에 그렇지 않아도 박한 예산이 그쪽으로 쏠렸다.
게다가 해마다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하는 상황이라 일손도 모자랐다. 1950년대 초만 해도 베를린은 아직 열린 도시였다. 약 6만 명의 서베를린 사람들이 동베를린에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동베를린 주민의 상당수가 서베를린으로 출퇴근했다. 1952년에 서독 쪽 경계를 막고 자유로운 왕래를 금하자 당황한 동독 주민들이 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1953년 상반기에만 거의 21만 6000명의 동독 주민이 서쪽으로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1953년 5월 말에는 식량난이 덮쳤다.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불만을 품고 대거 서독으로 이주한 까닭에 농산품 생산량이 급감한 것이다. 당에서는 위기를 극복한답시고 전 국민의 의무 노동시간을 일괄적으로 10% 상향 조정했다. 여기엔 집단 농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임금 인상은 없었다. 평소에 쌓였던 불만에 이 사건이 불을 붙인 것이다. 거센 저항에 부딪혀 6월 16일에 결정을 철회했으나 이미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동베를린 건설 현장에서 시작된 저항이 곧 전 동독을 휩쓸었다. 동쪽 언론에서는 물론 시위에 관해 일절 함구했지만, 서베를린 라디오방송국에서 전국적으로 속보를 내보냈기에 모두 알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동독 전역에서 서독의 리아스(RIAS)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서베를린 점령국이었던 미국이 설립한 방송국이었다. 동독 주민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나 정치 프로그램 외에 '연극 평론'이나 '일요일 퀴즈' 등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953년 6월 16일, 오후 4시 30분에 리아스 라디오는 베를린 시위 행렬에 관한 속보를 내보냈다. 전 동독 지역에서 그 소식을 들었고 너도나도 좀비처럼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노동 계층에 이어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따랐다. 곧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불길이 번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이 컸다는 뜻이다.
이튿날, 6월 17일 이른 아침 총파업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국적 봉기가 터졌다. 마침내 동독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이 폭발했다. 노동시간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부의 일괄 사임, 자유선거제 도입 및 독일의 재결합"을 외쳤다. '재결합'이라면 서쪽의 체제하에 다시 묶일 확률이 높고 그건 결국 공산 체제의 전면 부정을 뜻했다.
당시 동독의 경찰과 보안부는 무장이 허술한 상태여서 성난 시위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전 11시 0분경 소련 점령군이 탱크를 몰고 도우러 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러나 시위대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탱크에 돌을 던졌다. 마침내 총성이 울렸다. 동독 경찰과 소련 점령군이 합세하여 시위대를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저녁 시위는 모두 진압되었다.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나타난 소련 점령군의 탱크를 향해 젊은이들이 돌을 던지고 있다. 사진 작가 미상.
ⓒ Foto: 70 Jahre DDR
혼이 영원히 살기를
동독 초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되돌아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약 1만 3000명이 체포되었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중상자가 수백 명이었다. 체포된 시위대는 재판에 부쳐졌는데 그중 일곱 명의 소위 '주동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형은 바로 집행되었다.
동독 국민이 봉기 뒤에 얻은 것은 원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감시, 규율, 억압 장치가 대폭 확장되어 거의 전 국민이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를 위해 '슈타지'(Stasi)라고 불렸던 보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여러 시민 조직과 기관은 자체 내의 체제 비판자들을 감시해야 했다. 각 사업장과 행정기관에는 '노동자 계급 전투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창설했다. 곳곳에 슈타지가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국민의 숨통을 옥죄었다.
한편, 서쪽에서는 시위대가 외쳤던 구호 중 "독일의 재결합"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날의 봉기가 성공했더라면 통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서베를린 정부는 2주일 뒤 기존의 베를린 거리를 '6월 17일 거리'로 고쳐 부르고 그날을 '독일통일의 날'로 정했다.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념적으로는 통일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6월 17일 거리'는 본래 17세기 프로이센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대에 탄생한 대로였다. 베를린에 존재하는 두 개의 궁전, 즉 동쪽의 본궁과 서쪽의 별궁을 서로 잇기 위해 지었다. 그러다가 후일 히틀러가 구상했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의 중심축이 되어 히틀러 50세 생일에 퍼레이드가 열리는 꼴을 보아야 했다. 1945년 여름에는 베를린을 히틀러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소련군의 탱크가 반대 방향으로 바삐 달렸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탱크가 시민들을 향해 포를 겨누었다.
▲'6월 17일 거리' 중앙분리대에 서서 '평화, 평화, 평화'를 외치는 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가의 시구 "나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쳤다"를 형상화한 게르하르드 막스 작으로 1989년에 설치되었다.
고정희
오랜 세월이 흘러 1989년, 대로의 중앙 분리대에 '외치는 자'(Der Rufer)라는 이름의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여기 다시는 탱크의 행렬이 지나가선 안 된다는 염원의 상징이다. 그는 오늘도 거기 서서 '평화, 평화, 평화' 삼창을 외치고 있다.
지금 '6월 17일 거리'는 각종 시민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즐거운 장소로 변했다. 이 새로운 장소의 혼이 영원히 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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