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FES from 나이지리아
윤한샘
1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기네스 FES를 마실 수 있었다. 기네스 FES라는 이름 외에 여러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대부분 아일랜드 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내가 나이지리아산 기네스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이유는 단순히 한국에서 구할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지리아는 기네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나라다. 아일랜드 외에 첫 해외 양조장이 세워진 곳도 나이지리아다. 1962년 아프리카의 기네스 수요가 폭증하자, 나이지리아 이케자에 첫 기네스 양조장이 들어섰다.
아프리카의 건조한 기후로 맥아가 부족했지만 기네스는 수수, 카산바, 옥수수 같은 곡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현지화를 시도했다. 이런 노력은 나이지리아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고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기네스를 '외국 맥주'에서 '우리 술'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렇게 생산된 나이지리아 기네스 맥주는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정체성을 품으며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 마니아들이 찾는 맥주가 됐다.
맥주 역사의 아이러니
나이지리아는 기네스 판매량이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영국이 1위, 나이지리아가 2위, 기네스의 고향 아일랜드가 3위, 미국이 4위, 카메룬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나이지리아 외에 카메룬, 가나, 우간다, 케냐까지 기네스 양조장이 상주하고 있다.
그러니, 이 녀석을 봤을 때, 어찌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19세기 적도로 향하던 기네스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감각이 곧추섰다.
주인장은 더블린에서 직접 구매한 기네스 잔에 천천히 맥주를 따랐다. 흑색 물결 위로 아이보리 거품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왔다. 한 모금 혀를 적시니 은은한 초콜릿과 볶은 견과류 향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내 도드라지는 옅은 산미. 200년 전 이 검은 맥주가 적도를 지나 아프리카 대륙을 건널 때, 이런 산미가 스며들지 않았을까? 이 산미는 이전에 마셨던 기네스 FES에서 느끼지 못했던 맛이다.
향과 맛에서 나오는 밸런스는 전반적으로 투박했지만, 이런 면이 더 마음에 들었다. 수수와 옥수수 같은 현지 곡물뿐 아니라 나이지리아산 맥아가 발산하는 독특한 매력이었다. 7.5% 알코올은 요즘으로 따지면 높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수 세기 전 맥주 효모는 높아야 8% 정도의 알코올만 낼 수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나이지리아 기네스 FES를 입에 머금고 있으니, 또다시 이 말이 맴돌았다. 영국은 제국을 통해 포터를 세계에 퍼뜨렸지만 자만에 취한 나머지, 라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수백년 간 영국 치하에 있던 아일랜드, 그 땅에서 태어난 기네스는 영국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국민 맥주가 되다니. 참, 역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국의 길에 흐른 검은 맥주의 흔적은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도 볼 수 있다. 스리랑카의 대표 맥주 라이언 스타우트는 8.8% 알코올을 가지고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되는 기네스 FES는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더운 기후를 가진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알코올이 높은 검은 맥주들이 나오는 모습이 통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대영제국 식민지 시절 타고 들어온 기네스의 흔적들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스타우트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광복 80주년 다음 날, 나이지리아산 기네스를 마신 게 우연이었을까? 긴 세월 핍박받던 아일랜드가 영국을 뛰어넘어 문화 선진국으로 자리 잡고,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져 식민지로 흘러간 그들의 맥주가 세계를 호령하는 그 모습이 일본을 넘어 K컬처와 K민주주의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아쉬운 건 이 맥주가 지금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워 마실 수가 없다는 사실. 물론 들어와도 나이지리아산은 아니겠지만, 만약 이 검정과 노랑이 물든 병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검은 잔을 기울이며 세계 속에 자리한 한국을 더 맛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매콤한 떡볶이를 안주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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