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13 13:49최종 업데이트 25.11.1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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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이재명 정부가 '헌법존중 정부혁신 테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12·3 내란에 대한 공직자들의 가담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들에 대한 인사 조치의 근거를 만들기 위한 일이다. 내란에 명확히 가담한 공무원들을 그 자리에 둘 수는 없으므로 이는 당연한 조치다.

국가기구에 대한 인적 청산은 크든 작든 역대 정권에서 항상 되풀이됐지만, 1987년 6월항쟁 이전에는 그 규모가 훨씬 컸다. 미군정 초기에는 일본인 관료들이 반자동적으로 쫓겨났다. 얼마 뒤 복귀하기는 했지만, 친일파 관료들도 처음에는 많이 해임됐다.

역대 정권의 숙청 작업

이승만 때는 정부 출범 3개월 뒤부터 군부 숙청이 전개됐다.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그 표적이었다. 대구 10월항쟁 와중에 독립운동가인 친형 박상희를 잃은 박정희 소령은 여순항쟁 직후인 1948년 11월 11일 체포돼 서울 남산의 헌병대 영창에 수감됐다. 이런 숙청 작업으로 군부를 어느 정도 장악한 이승만은 이듬해에는 국회 반민특위를 비롯한 친일청산세력을 사라지게 했다.

4월 혁명에 힘입어 출범한 장면 내각은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을 비롯한 전 정권 인물들을 단죄했다. 1년 뒤인 1961년에 장면 정권을 붕괴시킨 박정희도 전 정권 인물들을 숙청했다.

박정희 정권도 그랬지만, 전두환 정권은 등장 과정 자체가 숙청 작업이었다. 1979년 12·12쿠데타는 선배 군인들에 대한 일괄 숙청이고, 1980년 5·17 쿠데타는 최규하 행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숙청이었다. 이 때문에 그해 5월 31일부터는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행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인치보다 법치가 힘을 더 얻은 6월항쟁 이후에는 종전 같은 대규모 숙청이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적 청산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권은 '사정관계 장관회의'라는 특별기구를 두고 공직사회에 칼을 들이댔다. <노태우 회고록> 하권은 "1990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사정비서관을 반장으로 하는 특별사정반을 편성해 비리 공직자와 부동산 투기자들을 색출"했다고 한 뒤 "1991년 3월 29일 사정관계 장관회의에서는 검찰 주도하에 고위공직자 및 사회지도층 비리에 대한 특별단속을 실시"했다고 말한다.

김영삼 정권은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에 대한 전격 숙청을 단행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권은 "군에 대해서 사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오랫동안 국방분과위원으로 있었다"라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군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갖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라고 한 뒤, 1992년 대선운동 때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외국 기자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을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라고 묻자, 김영삼은 "두고 보자"고만 답했다. 김영삼은 "그들은 아마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부세력과 적정선에서 타협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두고 보자"라는 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군부 숙청의 결과로 이어졌다.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뒤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종북·좌편향을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공무원 숙청을 전개했다. 이 칼날은 KBS 같은 공기업도 겨냥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9년 뒤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적폐청산이라는 구호와 함께 인적 청산이 있었다.

대중의 개혁 요구에 부응하는 게 우선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에서 탄핵 투표가 가결된 뒤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이정민

국가기구 숙청은 탐관오리 엄벌에 대한 대중의 전통적 열망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전 정권과 공무원들의 연결고리를 끊어 정권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측면도 당연히 강하다. 이 점을 생각하면, 4월 혁명과 촛불혁명 이후의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4·19혁명 직후의 장면 정권 때는 국가기구의 일원인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촛불혁명 직후의 문재인 정권 때는 그 일원인 검사들이 도전을 했다. 그 결과, 시민혁명 정신과 상반되는 인물이 정권을 차지하는 역설적인 일이 일어났다. 4월 혁명 뒤에는 박정희가 총을 들고 민주당 정권을 전복시켰고, 촛불혁명 뒤에는 윤석열이 검(檢)을 들고 민주당 정권을 흔들다가 결국 종결시켰다.

두 민주당 정권 역시 다른 정권들처럼 국가기구 숙청 작업을 벌였다. 그런데도 국가기구 내부에서 치명적인 반란 혹은 도전이 일어났다.

이렇게 된 것은 두 정권의 관료 집단 장악력이 낮아서가 아니다. 두 정권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집권에 결정적 토대가 된 시민혁명의 열기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점이다. 두 정권은 기존 체제에 토대를 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과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개혁 요구를 접목시키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정권과 대중의 간극이 벌어진 상태에서 국가기구 내부에서 하극상이 일어났다.

5·16 쿠데타 직후에는 상당수의 대중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마저 잠시나마 박정희에게 기대감을 걸었다. 문재인 정권 말기에는 촛불혁명을 지지했던 중도층 유권자 중에서도 국민의힘에 들어간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는 중도층이 가세한 시민혁명에 힘입어 집권한 정당들이 중도층 유권자들의 민심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 두 개의 민주당 정권이 낡은 관행과 과감히 이별하고 민심을 믿고 따랐다면, 다른 데도 아니고 국가기구 내부로부터 도전을 받을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시민혁명이나 각종 정치변동에 힘입어 출범한 정권은 공직자 숙청 못지않게, 그보다 훨씬 더 대중의 개혁 요구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 대중은 탐관오리 척결보다 낡은 체제의 척결을 더욱 기쁘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공직사회를 자기편에 두는 첩경이다. 두 민주당은 공직자 숙청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개혁 민심에는 부응하지 못했다.

이전 정권의 적폐나 내란과 관련된 공무원들을 추려내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집권 이전의 대내외적 쟁점들에 대한 공약들로부터 정권이 멀어지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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