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만호 기슭에 있는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브베에는 세계 1위 커피 기업 네슬레 본사가 있다. 1866년 이곳에서 창업한 이후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갈상
1866년 우리나라에서 병인양요가 벌어지던 해에 이곳 출신 앙리 네슬레가 창업한 유아용 분유 회사가 1938년에 브라질 커피협회로부터 의뢰받아 인스턴트커피 네스카페를 개발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한 해 매출이 1000억 달러 규모로 스위스 국민총생산(GDP)의 1/10을 담당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지만 본사를 로잔이나 제네바, 취리히 등 더 큰 도시로 옮기지 않고 창업자 고향 마을에 남아 있는 것도 매우 아름다운 역사다.
본사 건물은 규모가 매우 크고 아름답다. 방문객은 1층 로비까지 출입할 수 있고, 로비 끝에 있는 매장에서 커피 관련 용품을 구입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벅스 제품도 판매한다는 점이다. 2018년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네슬레가 스타벅스 브랜드 커피 제품을 전 세계에서 판매할 권리를 얻었다.
그 한 해 전인 2017년 당시 스타벅스를 넘어 제3의 물결 커피를 주도하던 미국 커피 기업 블루보틀을 인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네슬레였다. 2026년 네슬레는 블루보틀을 중국 투자회사 센트리움 캐피털에 매각하여 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
브베를 유명하게 한 것은 네슬레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유명인이 있다. 바로 미국의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이다. 채플린은 왜 생의 마지막 25년을 먼 이국땅 브베에서 보냈을까?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국은 반공 열풍, 애국 열풍이었다. 요즘과 비슷한 미국 우선의 보수 시대였다. 영화 홍보 차 외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받아 입국을 거부당했고, 채플린은 미국 대신 스위스 브베를 자신의 정착지로 선택했다. 그는 브베를 선택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세상이 조용하게 흐르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브라질 커피협회가 네슬레를 선택한 것도, 채플린이 브베를 선택한 것도 결국은 스위스가 지닌 평화 이미지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이미지로 성공한 국가, 인류에게 존경받는 국가는 역사적으로 없다. 그런 나라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다. 레만호가 보이는 호숫가에 서 있는 채플린 동상 앞에서 잠시 평화를 생각한 후 스위스를 떠나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선택했다. 이유는 통행료였다. 스위스 여행을 할 때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미화 45달러(6만 6000원) 정도 하는 '비네트'라는 스티커를 구입해 부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스티커는 1년짜리 한 종류밖에 없다. 만일 스티커 없이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적발되면 스티커 구입비의 다섯 배 정도 되는 벌금을 내야 한다.
45달러를 절약하기 위해 선택한 레만호 북쪽 국도를 통해 프랑스 국경 방향으로 달리다 보니 마치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유럽 시골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눈 덮인 언덕과 농장, 그리고 굴뚝에서 간혹 연기가 오르는 한가한 마을 풍경이 반복되었다. 45달러를 절약한 것이 아니라 450달러를 번 느낌이었다. 계획된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는 것, 좋은 여행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 만든다는 것을 느낀 낭만 가득한 하루였다.
브베에서 시작된 네슬레, 몽트뢰가 자랑하는 재즈 페스티벌, 샤모니에서 시작된 동계올림픽 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문화의 중심은 반드시 대도시가 아닐 수 있다. 네슬레의 도시 브베에서 생을 마친 찰리 채플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용히 흐르는 시간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 문화가 강한 작은 도시가 많은 나라에서 살고 싶다. 물론 그게 우리나라였으면 좋겠다.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의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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