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섭 경기도 전 평화협력국장그는 4월 24일 항소심 법정에 선다.
민병래
구속되고 나서 압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수사 검사인 전종택은 이화영과 만날 자리를 만들어주더군요. 세 번 정도 만났죠. 이화영은 "쌍방울이 방북 비용을 대납했고, 이를 이재명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할 테니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하라"라고 제게 권했습니다.
그는 "제3자 뇌물의 주범이 이재명이고 이화영이 종범"이라는 검찰의 구상을 받아들이려는 상황이었죠. 이화영은 검찰의 막무가내 공세를 일단 피한 뒤 재판정에서 진실을 밝히자고 했습니다. 당시 그는 아내 백정화와 아들까지 수사를 받고, 전세금은 압류된 데다 저마저 구속되면서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이화영과 저는 오랜 친구입니다. 제 아내와 이화영의 아내 모두 성균관대 동문입니다. 화영이와 정화는 '휴머니스트', 저와 아내는 '민족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1986년부터 안양에서 같이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저는 동양금속에서 밀링을 다뤘고, 화영이는 화천프레스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때 월급이 겨우 10만 원을 넘었으니 방세를 내기도 어려웠죠. 우리 두 부부는 아이도 같이 키우면서 누구든 월급을 타는 날이면 시장에서 통닭을 튀겨와 잔칫상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동고동락한 화영이와 정화의 고초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영이가 흔들리는 것을 나무랄 수만도 없었습니다. 화영이는 나름대로 복안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반드시 되살아날 거다, 이재명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하더라도 보고 날짜를 이재명이 외부 행사 때문에 도청을 비운 날로 잡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저를 내보내기로 작정한 화영이는 수원지검 1313호실에서 저와 마지막으로 얘기할 때 박상용 검사를 불러 "검찰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진술하면 신명섭은 확실히 나가냐"라고 물었습니다. 박상용은 "나가셔야죠, 별일도 아닌데" 라면서 화답했습니다. 저는 난감했습니다. 흔들리는 화영이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습니다.
화영이가 검찰의 먹잇감이 될 뻔한 위기를 막은 건 백정화였습니다. 검찰이 요구한 진술을 화영이가 재판정에서 확인하는 심리 날인 2023년 7월 25일, 정화는 (변호인을 해임하고) 재판정에서 "이화영 정신 차려"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왜 했다고 그래"라면서 "이게 이재명 재판이야, 이화영 재판이야"하고 외쳤습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화영이는 마음을 추스르고 의지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 위기를 딛고 일어섰기에 지금 진실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해주는 한반도평화의 중추가 될 수 있는 땅
저는 연해주에서 진행한 고려인 지원사업 중 콩 농장에 애착이 컸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연해주의 너른 들판에 콩 농사는 바다를 이뤘습니다. 콩을 통해 연해주와 남북이 어우러질 것을 꿈꿨습니다.
고려인이 생산하면 북의 동포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남쪽의 자본이 결합하면 세계 곳곳으로 판로가 열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콩' 하나로 연해주와 남북, 동북 3성, 재일교포 사회까지 연결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연해주에서 발해의 옛 성터를 즐겨 찾았습니다. 크라스키노에는 염주 성터가 있고, 훈춘에는 팔련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항일투쟁의 격전지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도 돌아보았습니다. 우스리스크를 품고 흐르는 수이푼 강가의 이상설 유허비,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전투 이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머무른 달네레첸스크 그리고 안중근의 단지동맹비까지. 그때부터 제게는 한반도의 상처를 씻고 화해와 협력을 이루는데 연해주가 큰 힘이 되리라는 믿음이 싹텄습니다.
2014년 모스크바에서 서울까지 유라시아 장정을 할 때도 북녘땅을 열고 판문점을 통과하는 게 숙제였습니다. 고려인이 러시아 외무성에 청원을 넣고 러시아가 북을 설득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진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도 결국 군사분계선 통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블라디보스토크와 가까운 나홋카에서 고려인 문화의 날이 여러 번 열렸습니다. 조선족과 재일교포를 포함해 남과 북의 영사관 직원과 주재원들이 너나없이 모였습니다. 보드카를 들이켜며 아리랑을 함께 불렀지요. 먼저 온 통일을 만났다는 감격에 눈물을 훔친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 구속되면서 많이 아팠습니다. 1985년 1월 민주화 시위로 구속되어 옛 서대문구치소 10사하 20방에 갇힐 때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습니다. 혁명가를 꿈꾸는 청년의 기상이 충만하던 때였죠. 수원구치소 나동 3층에 번호표 3217을 달고 들어갈 때는 허망했습니다. 내 삶이 찢기는 아픔도 컸으나, 군사독재 시절처럼 남북관계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유린당하는 현실이 더 마음 시렸습니다.
일주일을 끙끙대다가 광활한 콩밭을 비추던 연해주의 아침 햇살을 떠올렸습니다.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던 포시에트만의 바람을 되새기며 가슴을 활짝 폈습니다. 힘이 나더군요. 살아서 싸워나가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런 마음 덕에 쓰러지지 않고 오늘(24일) 항소심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법정이 기필코 세상에 진실을 드러내리라 믿고 싶습니다. 또 내가 살아온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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