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27 15:25최종 업데이트 26.04.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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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왜 소수자들을 탄압할까.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였다. 그렇게 힘을 얻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인데, 가진 것도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집단을 괴롭혀 봐야 얻는 게 있을까. 하지만 결국 도달한 결론은 그게 진짜 이유라는 것이었다.

영향력도 권력도 없으니 차별하고 배제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아주 쉽게 밀리고 밟힌다. 특히 소수자 권리 증진이 진보적 의제로 놓이거나 혹은 전임자 업적으로 남아 있다면 더욱 효율적인 목표물이 된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상대 진영이나 전임자를 공격하기 무척 좋기 때문이다.

근래 미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 취임 이후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인종·국적·계급 등을 막론하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허위 선동과 배제가 연방 정부 차원에서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민세관단속국의 비(非)백인에 대한 공격은 말할 것도 없다. 아니 단속국 요원의 총격으로 숨진 르네 니콜 굿의 사례에서 보듯 백인이라고 안심할 수도 없다.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은 연방 정부 지침에서 사라졌고 일부 기업들은 눈치를 보며 이 정책을 삭제하고 있다. 마치 경쟁처럼 대통령부터 나서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이어가고 있고 이는 법률과 제도에 있어 트랜스젠더 권리의 광범위한 억압을 낳았다. 일부 주에서 트랜스젠더는 제대로 된 신분증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깃발 전쟁'

2월 12일(현지시간) 미국의 국립공원관리청이 트럼프 행정부의 지침에 따라 뉴욕의 스톤월 인에서 무지개 깃발을 철거하자 정치인들과 활동가들이 맞은편에 무지개 깃발을 게양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런 흐름의 연장으로 최근 미국에선 뜬금없는 '깃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주된 목표물은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여섯 색 무지개 깃발이다. 편의상 '무지개 깃발'로 부를 이 깃발은 6월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을 맞아 연방 정부 청사 및 주 정부 청사에 걸리거나 혹은 관공서에 상시적으로 게양되어 왔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광경일 수 있겠지만 1970년대부터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꾸준히 이어져 온 북미에선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에 이르러 공공건물 게양대에 걸 수 있는 깃발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 깃발이 퇴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가령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연방 정부 지침에 따라 미국 국기, 내무부 깃발, 전쟁포로 및 실종자 추모기만 게양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국립공원관리청이 관리하는 시설에서 무지개 깃발이 모조리 철거되었는데 그런 시설 중에 뉴욕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톤월이 어떤 장소인가. 1969년 경찰의 지속적인 탄압과 억압에 맞서 뉴욕의 성소수자들이 저항을 시작한 현대 북미 성소수자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 아닌가. 이런 공간에서조차 무지개 깃발을 철거하라는 건 트럼프 정부가 이어가는 '깃발 전쟁'이 실은 노골적인 소수자 탄압 행보의 연장임을 보여준다.

보이시에서 철거된 무지개 깃발

1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의 스톤월 국립 기념비에 무지개 프라이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이날 트럼프 행정부는 LGBTQ+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이 기념비 위에 무지개 깃발을 계속 게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스톤월 인은 1960년대 게이 해방 운동의 시발점이 된 시위가 벌어진 장소다.AFP 연합뉴스

다행히도 여러 단체의 법정 투쟁 끝에 무지개 깃발은 다시 스톤월에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깃발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곳은 많다. 아이다호주 최대 도시인 보이시(Boise)도 그런 곳들 중 하나다. 보이시는 한국인에게는 낯선 곳이겠지만 아이다호의 주요 시설이 위치한 거점 도시다.

아이다호는 원래 공화당 지지세가 강하지만 보이시는 보통 진보적 여론이 강한 성향의 대도시이기도 하고 민주당 텃밭으로 여겨지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이주해 온 인구도 많기에 꽤 오랜 시간 민주당 계열 인물들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시 정책에 진보적인 기풍이 녹아 있기에 대략 10년 동안 보이시의 시 청사 깃발 게양대에는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단순히 특정한 소수자 집단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화합과 포용의 메시지로서 말이다.

아이다호주는 이 깃발을 노렸다. 연방 정부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회가 사전 승인하지 않은 깃발을 게양하는 지방 및 주 정부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을 위반하면 깃발 하나당 하루에 2000달러(295만 원)의 벌금을 매기도록 했다.

보이시의 시장 로렌 맥린은 아이다호주 정치인들이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노려 분열을 조장한다고 항변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아이다호주는 보이시의 상위 행정 구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은 10년간 자리를 지킨 보이시 시청 앞 게양대의 무지개 깃발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은 아니다. 맥린 시장은 '우리는 법을 지키겠지만 이 법은 깃발에 대한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을 때

보이시 시청은 무지개 깃발을 제거한 후 깃대에 무지개 예술작품을 추가했다.유튜브 갈무리

보이시는 반격에 나섰다. 맥린 시장은 게양대에 깃발을 거는 대신 게양대 자체를 성소수자 자긍심의 무지개로 둘러버렸다. 마치 포장지를 두르듯 말이다. 또한 시청 청사 외부에는 커다란 자긍심의 무지개와 함께 '모두를 위한 도시를 만들자'라는 문장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보이시의 시청은 밤이 되면 조명으로 비치는데, 맥린 시장은 이 조명의 색을 아예 트랜스젠더 상징 깃발 색으로 바꾸었다. 보이시 시장의 대변인은 '모두에게 안전하고 따뜻한 도시가 되기 위해 우리가 매일 지켜나가는 가치에 대해 시 당국의 변함없는 헌신을 보여주는 '예술품'들이 시청에 설치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통상적인 입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요지는 이건 예술품이지 아이다호주가 금지한 '깃발'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렌 맥린 시장의 행보는 소수자 배제와 검열에 맞선 통쾌한 한 방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이 그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극우 정치는 다양성과 포용과 평등의 상징을 사회에서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때때로 성공하기도 한다. 마치 아이다호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이시가 보여주었듯 누가 그런 가치의 상징을 삭제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정신을 유지하는 한 어느 순간 어디선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 건 가능하다. 마치 보이시의 시장과 시민들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시대가 야만스럽고 우리가 이룬 진전들이 모두 허물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평등과 포용에 대한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마음이 지치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각자의 마음과 신념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고 매우 실질적인 일이다. 그랬을 때, 그 가치는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 어디선가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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