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놀타 A-7000촬영낡은 파란 대문과 빛바랜 노란 담벼락의 선명한 대비. 그사이로 흐릿하게 드리운 아침 햇살의 투명한 입자가 미놀타의 눈을 통해 더욱 하얗게 번진다. 세월의 녹을 머금은 하얀 우편함은, 이제는 끊겨버린 철길처럼 누군가의 간절한 소식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보일러 선전' 스티커마저 이 맑은 빛 앞에서는 그저 단정한 삶의 흔적일 뿐이다.
이재필
카메라 바디에 물린 렌즈는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50mm f1.7 표준 렌즈였다. 사진을 처음 배우는 이들에게 우리는 늘 50mm를 권하곤 한다. 이 화각이 '표준'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많이 쓰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무언가에 집중해서 바라볼 때의 시야각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다.
광각 렌즈처럼 세상을 억지로 넓혀 보여주지도 않고, 망원 렌즈처럼 특정 피사체를 비현실적으로 압축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 눈이 머무는 그만큼만을 정직하게 잘라내 주는 화각이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센서의 크기나 사용자 편의에 따라 40mm나 45mm를 표준의 범주에 넣기도 하지만, 나 같은 '옛날 사람'에게 표준의 기준은 늘 50mm라는 숫자에 머물러 있다. 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려 세상을 과장되게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담백한 마음이다.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미놀타 a-7000의 바디는 어깨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80년대 당시에는 금속 바디를 선호하던 프로 사진가들에게 "장난감 같다"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산책길 메이트로서는 이보다 훌륭할 수 없다.
50mm 렌즈를 마운트한 이 가벼운 조합은, 걷는 즐거움과 찍는 즐거움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잡아주었다. 앞서가는 동반자의 경쾌한 발걸음 뒤를 따르며, 렌즈를 통해 5월의 투명함을 한 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지잉- 츠왕', 40년 전의 혁명이 들려주는 리듬
운흥동 골목에 접어들자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옛 기찻길의 흔적이 남은 담벼락과 낮은 지붕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고, 여기서 미놀타 a-7000은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셔터를 반쯤 누르면 들려오는 특유의 기계음, "지잉- 츠왕!" 소리와 함께 렌즈가 스스로 움직여 초점을 잡아낸다.

▲미놀타 A-7000촬영오래된 붉은 벽돌집과 거친 콘크리트 계단의 경계. 그 위를 유유히 거니는 거대한 고양이가 투명한 아침 빛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죽은 듯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는 시멘트 벽 위에 자신의 존재를 선명한 그림자로 새기며, 고양이는 낯선 사진가의 시선을 잠시 잡아둔다. 40년 전 기술이 포착해낸, 가장 느리면서도 가장 생생한 운흥동의 찰나다.
이재필
지금 우리에게 오토포커스(AF)는 스마트폰에서도 당연하게 누리는 기능이지만, 1985년 당시 미놀타 a-7000의 등장은 그야말로 천지개벽과도 같았다. 이전의 카메라들이 렌즈마다 별도의 모터를 달거나 수동으로 렌즈를 돌려야 했던 시절, 미놀타는 카메라 몸체(바디) 안에 모터를 넣고 모든 렌즈를 자동으로 구동시키는 'A-마운트'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완성했다.
이는 훗날 니콘이나 캐논 같은 거대 기업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표준이 되었고, 현재 우리가 열광하는 소니(Sony) 미러리스 카메라 '알파' 시리즈의 시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작 방식 또한 흥미롭다. 이전 세대의 카메라들이 아날로그 다이얼을 돌려 수치를 맞췄다면, 미놀타 a-7000은 현대의 DSLR이나 미러리스처럼 버튼과 LCD 패널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니콘의 보급형 AF기인 F50 모델과도 흡사한 이 조작계는, 복잡한 고민 대신 사진의 본질인 '구도'에 더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미놀타 A-7000촬영시간이 멈춘 듯한 옛 한옥 점빵의 처마 밑.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가던 동반자가 두 팔을 활짝 펴고 5월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헤진 차양과 낡은 기와, 덩그러니 놓인 오토바이의 투박함마저도 그녀의 경쾌한 몸짓 앞에서 투명한 배경으로 녹아든다.
이재필
한 컷 한 컷 장인처럼 설정을 고민하던 수동의 맛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카메라에 많은 것을 맡기고 풍경 속으로 툭툭 걸어 들어가는 '포토워크'가 더 마음에 들 때가 있는것 같다. 40년 전의 기술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이는 초점 덕분에, 저는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과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낼 수 있었다.
맑은 렌즈가 건네는 위로와 풍경의 미학
휴일 아침의 마을은 평화로웠다. 마을 어귀, 아이들의 온기가 떠나간 채 덩그러니 놓인 낡은 놀이기구들이 보이고,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슬어 자칫 쓸쓸해 보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미놀타 구형 렌즈 특유의 맑고 투명한 묘사력 덕분인지 그 모습조차 단정하고 평안해 보였다.

▲미놀타 A-7000촬영이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주차장 한구석. 노란색 미니 바이킹만이 홀로 남아 세월을 낚고 있다. 투명하게 닦인 미놀타의 렌즈를 통하니, 낡고 바랜 조형물조차 마치 어제 막 도착한 선물처럼 단정하고 깨끗해 보인다. 기계의 소음이 거세된 고요한 풍경 속, 멈춰진 바이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잠들어있는 동심을 조용히 소환한다.
이재필
멀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는 대형 크레인들도 평소라면 도시의 소음과 복잡함을 상징했겠지만, 50mm 렌즈의 프레임 안에서는 정지된 시간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게 녹아드는걸 느낄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미놀타의 렌즈들은 흔히 '투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하게 색을 왜곡하거나 날카롭게 선을 세우지 않고, 그저 빛이 통과하는 길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느낌이었고, 그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저의 마음속에 쌓여있던 일상의 피로와 몸의 무거움도 조금씩 옅어지는 듯했다.
▲미놀타 A-7000촬영마을 낮은 지붕들 너머, 5월의 파란 하늘을 향해 힘껏 뻗어 올린 풀잎들의 기세가 당차다. 마치 '세계 최초의 바디 내장형 AF'라는 타이틀을 달고 당당하게 등장했던 미놀타 7000의 모습처럼, 어지럽게 뒤엉킨 전깃줄과 멀리 보이는 현대식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자신만의 꼿꼿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재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카운터에 기록된 필름의 숫자를 확인하며 묘한 포만감을 느꼈다. 잔소리에 등 떠밀려 시작된 아침이었지만, 결국 나는 이 오래된 카메라를 통해 5월의 찬란함을 선물 받은 셈이다. 미놀타 a-7000은 내가 세상을 향해 조금 더 가볍고 기분 좋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었다.
최첨단 기술이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끔 이런 '오래된 미래'를 찾는 이유는, 그 기계들이 가진 투박한 소리와 정직한 결과물 속에 우리의 기억과 감성을 투영할 수 있는 빈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5월의 맑은 공기를 듬뿍 마신 미놀타의 결과물들이 인화되어 나올 날을 기다리며, 나는 다음 산책의 핑계가 될 또 다른 오래된 카메라를 즐겁게 상상해 본다. 이번엔 또 어떤 빛깔로 저의 하루를 투명하게 씻어내 줄까? 아침의 따가웠던 잔소리는 어느덧 부드러운 봄바람이 되어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