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3 11:59최종 업데이트 26.05.1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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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시작과 끝을 다룬 <그들이 있었던 곳>을 펴낸 정찬 작가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막으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모습에서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이 떠오른 것은 역사의 신비였다”고 말했다조성식

5월은 늘 뜨겁다. 5.18 광주에 대한 애절한 기억 때문이다. 2024년 12월 광주의 참상이 되풀이될 뻔했다. 5.18 당시 광주 시민은 도청에 집결했고, 12.3 당시 서울 시민은 국회로 달려갔다. 사건의 결말은 대조적이지만, 중무장한 특수부대 군인들이 출동하고 국민이 맨주먹으로 맞선 것은 소스라칠 정도로 닮았다.

중견 소설가 정찬씨가 5.18의 시작과 끝을 다룬 <그들이 있었던 곳>(말하는 나무)을 펴냈다. 작가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막으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모습에서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이 떠오른 것은 역사의 신비였다"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를 언급했다.

아마도 계엄 발동 요건을 강화하고 5.18 정신을 전문에 담으려는 국회의 헌법 개정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그의 말이 더욱 빛났을지 모른다. 피 냄새 가득한 꽃봉오리가 만개해 열매를 맺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작가를 만나 5.18 정신을 되새겨봤다.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

정찬 작가의 소설 <그들이 있었던 곳> 표지.말하는나무

-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6주년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광주 이야기를 하면 늘 마음이 무겁다. 왜 그럴까?

"일상생활에서 역사로 감각되는 사건이 있다. 뭔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에너지로 작용하는 사건. 흔히 말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5.18은 소수의 정치군인들이 권력에 대한 사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을 동원해 주권자인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 작가가 생각하는 5.18 정신은 무엇인가?

"광주 시민에 대한 공수 특전단의 폭력은 인륜을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그에 대한 원초적 분노가 사람을 모이게 했다. 모여서 토론하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인륜의 무너짐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연결됐다. 시위대가 휩쓸고 다닌 사나흘 동안 범법 행위가 전혀 없었다. 놀라운 시민정신이었다. 이런 것들이 광주 정신이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계엄군이 진주한 1980년 5월 18일부터 도청이 함락된 5월 27일까지 열흘간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을 날짜와 시간순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짧게 끊어가는 단문형 서술은 속도감과 긴장감을 높인다. 카메라로 찍은 듯한 정밀한 묘사는 현장성을 부각한다.

1983년 등단한 작가는 장편 <광야>, 중편 <슬픔의 노래> <완전한 영혼> 등의 작품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고 치유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24년 전 나온 <광야>를 새롭게 고쳐 쓴 작품이다.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다뤘다. 다만 인물의 경우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자료 수집과 취재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 든다. 구성과 집필 과정을 설명한다면?

"광주를 실제로 겪은 분들이 남긴 기록이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 그 기록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겪은 역사적 실존적 공포와 생명 훼손에 대한 두려움, 내면의 감정 등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최대한 감정이입을 하면서 썼다."

- 광주를 다룬 기존 작품과 어떤 점이 다른가?

"5.18이 어떤 사건인지는 다 안다. 하지만 왜 5.18 비극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전개돼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싶다. 이를테면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나고 '해방광주'라는 공동체가 생긴 후 그 속에서 벌어진 갈등 말이다. 광주 항쟁의 전 과정을 총체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소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3 비상계엄이 5.18을 떠올리게 한 후, 광주 시민이 어떤 고통과 폭력을 겪으면서 5.18 정신을 형성했는지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시위대 총기 무장 유도

-책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의 총기 무장을 유도하려고 일부러 발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의혹이 아니라 가능성 높은 합리적인 견해다. 당시 광주에는 무기가 없었다. 당국에서 시민 무장을 막으려 모든 무기고를 비웠기 때문이다. 무기를 구하려면 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시민군은 차량조를 편성해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전까지 광주를 드나드는 차량을 통제하던 계엄군이 이를 막지 않았다. 무기를 실은 차량이 들어올 때도 구경만 하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운 좋게 군부를 장악했지만, 소수인 데다 미국의 신뢰를 얻지 못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그런 상황에서 광주에서 큰 시위가 벌어지자, 초기에 강력하게 진압하려다 실패했다. 시민 분노가 폭발하면서 시위 규모가 점점 커졌다. 도청이 시민들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진압해야 했는데 무기도 없는 시민 수만 명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민들이 총기로 무장하면 진압할 명분이 생긴다. 어차피 무기 수량은 한정됐기에 소수만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시민과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을 분리한다는 작전인가?

"이른바 강경 저항 세력을 시민들로부터 분리해 적극적으로 진압할 명분을 갖춘 셈이다. 당시 광주 시내에 떠돌던 간첩 출현설, 북한군 내통설 등이 다 그것과 관련됐다."

시민군의 분열과 대립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진 시민군 내부의 치열한 갈등을 깊이 있게 다뤘다.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 그룹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시민사회도 분열 양상을 보였다. 양쪽의 대립은 서로 권총을 들이댈 정도로 심각했다. 온건파 또는 타협파가 다수였지만, 최종 주도권은 결사항전을 외친 소수의 강경파 또는 원칙파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필연인지, 작가에게 물어봤다.

"다수가 모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해방광주라는 공동체에도 권력의 법칙이 작동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분열이 생길 수 있다. 비록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철수했지만, 신군부가 광주를 그냥 놔둘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곧 닥칠 진압 작전을 생각하면 두려웠을 것이다. 무장 군인들과 무장 시위대가 전투를 벌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시민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싸워온 시민군을 두려워한 것이 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 사람들을 애틋해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이중적 감정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병자호란 때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이 떠올랐다. 어느 한쪽이 무조건 맞는다거나 틀린다고 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계엄사에서 무기를 반납하면 진압 작전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사실상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그걸 놓고 도청 시민군 지휘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광주 시민의 안전을 위해 무기를 반납하자는 쪽이 다수였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게 그들 주장의 골자였다. 그런데 항전파라고 시민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계엄군의 태도였다. 계엄군은 평범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는 아무런 사과도 없이 무기 반납만 요구했다. 이에 시민들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계엄사는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폭도라고 규정했다. 간첩과 불순 세력이 침투해 기층민과 빈곤층의 불만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언론이 계엄사 발표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함으로써 광주 시민은 폭도가 돼 버렸다.

명분 싸움이기도 했다. 시민군은 무기를 반납할 테니 폭도가 아님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계엄사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중간에 협상파 요구대로 감금했던 시위대 일부를 풀어주기도 했다.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구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걸 들어주면 진압 명분을 잃기 때문이었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5.18민주화운동당시 희생된 시민들. 1980.5.25연합뉴스

- 시민군도 명분 때문에라도 계엄군에게 항복할 수 없었을 듯싶다.

"앞선 시민들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당시 도청 시민군이 계엄사 요구에 굴복했다면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소년 소녀들이 그 참상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기를 반납했다면 그 어린 세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도청이 함락되기 한나절 전인 5월 26일 정오, 항쟁 지도부는 기동타격대 조직과 더불어 계엄령 해제, 전두환 공개 처형, 왜곡 보도 중단, 민주정부 수립 등 7개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신군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건 것은 결사항전의 표시였다.

- 만약 시민군이 계엄군 요구대로 무기를 다 반납했다면 광주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도청에 끝까지 남은 분들의 희생은 없었겠지. 대신 광주 시민이 흘린 피가 그냥 묻혀버렸을 거다. 그리고 1980년대 내내 치열하게 군부정권에 저항했던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았을 거다. 이른바 민주화가 언제 이뤄질지 가늠할 수 없고 정치 후진국 상태가 지속됐을지 모른다."

- 광주 시민들이 12.12를 용인한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다가 좌절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미국이 곧 광주를 구출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는데.

"많은 시민에게 미국은 한국을 도운 나라이고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로 인식됐다. 더욱이 인권을 중시해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던 카터 행정부였기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미국은 진압 작전을 승인했다. 시민들의 거센 저항이 한반도 정세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우려했다. 결국 자기들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선택을 한 거다."

작가는 "우리나라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데 광주의 희생이 큰 힘이 됐다"고 진단했다.

"광주 진압을 합리화한 최대 명분이 폭도, 불순분자, 간첩, 좌파 척결이었다. 광주 이후 우리 사회에서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가 커졌고, 변혁 세력은 좌파의 공간을 넓혔다. 이전에는 나올 수 없었던 사회주의 성향 책도 많이 나왔다. 반공은 닫힌 사회다. 사상의 자유가 있는 사회는 열린 사회다. 광주의 희생 덕분에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바뀐 것이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희생

정찬 작가는 "우리 사회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데 광주의 희생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조성식

<그들이 있었던 곳>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작품이다. 작가는 시민군 최후의 항전을 두고 '그들이 총을 든 것은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승리를 믿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계엄군을 죽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총을 든 것은 침몰하는 해방광주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절절하게 적었다. 그에게 해방광주의 현실성과 그 의미를 물어봤다.

"계엄군이 물러났을 때 해방광주가 세워졌다. 그때부터 분열이 시작됐다.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해방광주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도청에 남게 됐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면, 민주주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헛된 게 아닌가? 광주 시민의 희생을 기리고 광주 정신을 살리려면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거다. 그 결과 충돌했던 두 그룹 다 승리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승리였다."

- 흔히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고 한다. 해방광주 내부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의 핵심도 그것이었다. 시민군이 죽음으로써 지키려 했던 가치를 되짚어 본다면?

"앞서 말했듯 인륜과 인권, 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것이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 소중한 생명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게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또 희생을 선택했다."

해방광주가 무너지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납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가슴이 무거워지고 먹먹해진다. 마지막에 계엄군에서 이탈한 강선우와 신부 도예섭이 시민군의 최후 저항 장소인 도청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은 작가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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