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5 10:43최종 업데이트 26.06.2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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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베를린 공기는 뜨거웠다. 동네 야외 맥주집, 카페, 식당마다 스크린을 내걸고 월드컵 경기를 보여주는 까닭에 새벽까지 함성이 이어졌다. 토요일 오전에는 수은주가 이미 30도로 치솟았다. 신문을 보니 "베를린 스트레스 지수 독일 최고"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소위 말하는 코르티솔-스트레스-인덱스 2026'가 최고치에 달했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베를린은 높은 병가율과 함께 전형적인 대도시 스트레스 패턴을 보인다고 한다. 과도한 소음, 높은 인구 밀집도, 불규칙한 노동시간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베를린보다 인구밀도가 4배 높고 교통혼잡 지수도 휠씬 높은 서울 시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어떨까? 베를린 시민들의 엄살이 또 도졌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함부르크나 뮌헨처럼 1인당 구매력이 높은 도시들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는 결과가 나왔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버텨내는 완충지대는 되어줄 수 있다는 다소 씁쓸한 결론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와중에 종일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는 거리 음악 축제 Fête de la Musique가 또다시 도시 공기를 달굴 것이다.

1인당 구매력과 함께 음악도 스트레스 해소에 분명 도움을 주겠지만 5월 초부터 주말마다 축제가 열리다 보니 월드컵과 겹치면서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머릿속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동네 주말 장으로 향했다. 신선한 채소와 싱그러운 과일, 꽃과 갓구운 빵의 향기가, 일상의 냄새가 그리웠다.

베를린 두 할머니베를린 "미래를 위하는 할머니들" 모인의 페트라(좌)와 카린(우)고정희

너희들 미래는 우리 할머니들이 책임질게

그런데 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나이 지긋한 여인 두 명이 서서 말을 걸어 왔다. 기후에 관심 있으시면 우리랑 얘기 좀 하실까요? 목에는 푸른 지구가 그려진 하트 모양의 초대형 펜던트를 걸고 손에는 전단을 들고 있었다. 펜던트에는 "미래를 위하는 할머니들 omas for future"이라고 쓰여 있었다. "오마 oma"는 할머니를 부르는 다정한 호칭이다. 이 움직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2018년 스웨덴의 14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청소년 기후 운동이 독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에 부응하여 50세 이상의 여성들이 유사한 모임을 결성했다. 그들은 지구 환경파괴의 책임이 우리 세대에 있다고 말하며 손자들의 미래를 지켜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선언했다. 기후 위기와 생물다양성 상실 문제를 널리 알림과 동시에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2019년 라이프치히에서 시작하여 삽시간에 독일 전역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까지 번져 현재 약 100여 개의 지역 모임이 결성되었다. 베를린 지역 모임엔 약 10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omas_for_future_logo독일 미래를 위하는 할머니들 모임omas for futuer의 로고O4F Berlin

장터에서 만난 두 명의 여인 중 카린 바지 여사가 내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겠다고 답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뷰 질문지를 만들어 이메일로 보낸 뒤, 받아 온 기후 퀴즈집을 펼쳤다. 자신 있었다. 연방환경청 자료를 꿰고 있는 내가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라면서 퀴즈를 풀기 시작하다가 완전히 낭패했다. 보통 수준의 퀴즈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한사람이 1년에 사용하는 물은 약 4만 7500리터 정도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과 각종 소비재 생산에 들어가는 간접 소비량까지 합치면 얼마나 되겠느냐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거의 50배 (!)라고 한다. 그리고 이산화탄소 배출 비율이 가장 큰 분야를 1) 소비 2) 주거 3) 식생활 4) 교통에서 고르라는데 여태 나는 주거비가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일등은 24.3%의 '소비'였다. 주거가 22.3%로 2등이고 그다음은 20.4%의 교통, 그리고 식생활이 15.5%였다. 우리가 사서 입고, 쓰고, 버리는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들어간 에너지와 자원까지 묶어 소비라고 정의하는데, 결국 우리의 소비 방식이 가장 큰 문제라는 뜻이다. 역으로 쓸데없는 소비를 줄이면 환경보호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니 희망적이다.

다음 날 다시 만난 카린과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3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슬픔만으로 시간을 채우기 싫어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그는 물류가 넘쳐나는 요즘, 너무 싸니까 불필요한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할머니 운동이 정치 구호만 거창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은 나 같은 사람들의 무지를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린은 이 퀴즈집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가지고 가서 아이들과 함께 푼다고 귀띔해 주었다. 아이들이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신바람이 나서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든다고 했다.

베를린 뜨개꽃 양탄자지난 5월 10일 어머니날 베를린의 파리광장을 뒤덮은 뜨개꽃 양탄자Karin Badji

광장을 뒤덮은 뜨개꽃 양탄자

할머니들의 활동 중에서 내 시선이 유독 이들의 '뜨개질 프로젝트'에 머문 것은 순전한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뜨개바늘을 꽤 부지런히 놀리던 사람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서랍 깊숙이 바늘을 묻어둔 지는 오래되었지만, 수작업이 주는 재미와 기쁨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퀴즈집이 준 지적인 충격만큼이나, 지난 5월 10일 이 할머니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넓은 광장을 '뜨개 꽃'으로 뒤덮었다는 이야기는 내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었다.

뜨개질 프로젝트는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예술 운동(ARTagainstECOCIDE)이었다. 이를 위해 독일 전역에서 할머니들이 겨울 내내 뜨개질을 하여 꽃 4만 송이를 만들어 베를린으로 보냈고 그것을 다시 180개의 양탄자로 엮어 광장 바닥에 펼쳐놓았다. 참가한 할머니들은 꽃의 빛깔을 돋보이게 하려고 흰옷을 입었다. 5월 10일은 어머니 날이었다. 독일의 어머니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이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방문하기 쉽게 일요일로 정했고 이날은 어머니에게 꽃을 선물하는 게 풍습이다. 그런데 이번 어머니날에는 어머니들이 모두에게 꽃을 선사한 것이다. 감동적이긴 하지만 뜨개질이 기후 보호, 생물종 보호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카린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 뜨개꽃 양탄자지난 5월 10일 어머니날 베를린의 파리광장을 뒤덮은 뜨개꽃 양탄자. 생태계 파괴를 형사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제정을 종용하는 퍼포먼스Karin Badji

답은 의외로 정치적이었다.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펼쳐진 뜨개 꽃밭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생태 학살 ecocide"의 법적 처벌이었다. 대규모 환경파괴를 국제형사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다. 현재 유럽 차원에서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독일에서도 법제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할머니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뜨개꽃 양탄자로 시위한 것이다. 꽃 양탄자는 지금 점점 사라져가는 야생화 풀밭을 대체한 셈이었다. 뜨개질이라는 수작업은 물론 과생산, 과소비 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다.

그런데 광장을 덮을 만큼의 꽃을 뜨기 위해서는 실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반짓고리를 열어 보면 꽃 한두 송이 뜰 만큼의 실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수만 송이쯤 되면 말이 좀 달라진다. 이 문제를 베를린 기술박물관에서 해결해 주었다. 기술박물관은 매주 화요일이면 할머니들이 모여 뜨개질할 수 있도록 섬유 공방의 공간을 내주었고 고품질의 실을 제공하고 각종 재봉 도구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커피와 과자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이 사실을 홍보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원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뜨개꽃 양탄자뜨개꽃 양탄자는 어머니날 행사 뒤에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Karin Badji

카린과 꽃밭 얘기를 하던 중 일본 할머니들이 뜨개질한 꽃을 보내왔다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자신은 잘 모르지만 요코하마 할머니들이 열한 송이를 보내온 건 확실하다고 했다. 열한 송이! 순간 자극 받아 "내년에는 한국 할머니들의 꽃을 모아보겠다"라고 큰 소리를 쳐 버렸다. 카린이 좋다며 손뼉까지 친다. 이제 수습해야 한다. 우선 여고 동창들 단톡방을 두드릴 생각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할머니들도 손자 세대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독일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할머니들의 열정을 생각하면 열한 송이가 아니라 광장 반은 덮을 만큼 모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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