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 1883년
퍼블릭 도메인
가장 극한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이다. 1581년에 일어난 이반 4세의 끔찍한 사건을 담고 있다. 고작 세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에 오른 후 러시아 최초의 차르가 된 이반 4세는 잔혹한 폭군으로 유명했다. 그림은 그의 잔인성이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건은 세 겹 치마를 입는 황실 전통을 어기고 임신한 며느리가 편한 치마를 입은 데서 비롯되었다. 황제는 황족의 품위에 먹칠했다며 쇠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폭행을 만류하던 황태자가 아버지의 쇠 지팡이에 맞아 죽었다.
그림은 한바탕 폭력이 휘몰아친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반 4세가 숨통이 끊긴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다. 한 손으로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막아보지만 손가락 틈새로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주변의 물건도 광기 어린 행동의 흔적을 담고 있다. 뒤로는 의자와 쿠션이 나뒹군다. 바닥의 양탄자가 심하게 헝클어져 있어서 긴박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가족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불청객이나 이물질로 바라보는 시선과 아들에게 쇠 지팡이를 휘두르는 아버지의 폭력적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단지 개인의 특수한 사정이 이유인가, 아니면 사회적 요인이 결합해 있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은 가정이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준다. 사회적 억압과 갈등이 가족 구성원 내의 균열로, 극단적인 가부장제가 권력과 가정에서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억압적인 사회의 그림자가 가정의 인간관계에 짙게 영향을 끼친다. 가정이 완전하게 고립된 섬이 아닌 이상,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 불가피하게 연결되거나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고 참여한다. 어떤 부분은 점선으로 연결되고, 어떤 부분은 실선이다. 이 연결 통로를 타고 사회는 외부적인 의도에 맞게 가정을 움직이려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정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뒤섞인 공간이라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문제의식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설명한 가정의 성격 변화도 이를 탐구한 내용이다. 우리는 서구를 대표하는 고대사회로 그리스와 로마를 하나로 묶어 생각한다. 하지만 가정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다른 생각과 관습이 지배했다.
"가정과 가족생활이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로마인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 덕택이다. 이들은 그리스인과 달리 결코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 두 영역은 공존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의하면 그리스 도시국가는 가정이라는 자연적 결사체와 정치적 조직체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모든 시민은 사적 생활 외에 두 번째 삶인 정치적 삶에 속했다. 두 가지가 결합해 있기는 하지만 폴리스의 의식적 활동 비중이 크기에 공적인 영역이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 오랜 세월 혈연 중심의 씨족·부족의 자연적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인위적인 국가체제가 만들어지는 단계이니 공적인 필요를 더 강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의 이익을 위해 사적인 영역이 희생되었다. 이에 비해 로마제국은 상당 기간 국가체제가 안정된 단계라는 조건이 반영되어 사적 영역에 대한 외적인 개입이 그리스보다 덜했다.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별은 훨씬 덜 선명한 방향으로 변했다. "가계 또는 경제활동이 공론 영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전까지 가정의 경제활동은 소규모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가족 형태가 지배하던 때이니 가족 내부의 노동력만으로도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하는 근대의 새로운 조건은 가정의 경제활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와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생계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소규모 토지에서의 농경과 달리 대공업에서의 공장은 개별 노동자의 가족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단위가 아니다.
대규모 노동력 공급은 사회적·제도적인 시스템에 의해 가능하다. 노동은 이제 개인적 성격을 상실하고 사회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개별 가정의 생계가 사회에 의존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던 옛 경계선은 불분명하게 되었다. 가정에서 공적인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증가했다.
근대 유럽에서 일부 사람은 공업화로 인한 경제적인 압박과 혁명과 반혁명의 정치적 격변에 지쳐 가정의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았다. 하지만 문화적인 부분에서의 유행이었을 뿐 경제적·사회적 부분에서 가정은 여전히 두 영역이 뒤섞여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소유와 부가 역사적으로 어떤 사적인 문제나 관심사보다도 공론 영역과 더 많이 연관"되었다는 점에서 가정이 순수하게 사적인 안식처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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