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연습생 출신 홈런왕 장종훈야구장에서도 대졸이 아니면 대접받지 못하던 80년대 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야구장으로 흘러든 장종훈이 전설적인 기록들을 쏟아내며 '고졸'에 더해 '연습생'이라는 존재들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한화 이글스
1985년, 한국프로야구의 7번째 구단으로 창단한 이글스는 선수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3년 전 리그와 함께 창설된 6개 구단은 기존에 활동하던 실업리그의 선수들을 출신지 별로 나누어 뼈대를 놓았고, 해마다 각 연고지에서 배출되는 선수들을 보태 선수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발주자 이글스는 딱 그해 대학을 졸업하던 연고지 출신 이상군, 민문식, 전대영. 그리고 선수들이 남아돌던 삼성과 선수가 남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선수들이 좀 있던 롯데가 보내준 5명을 보탠 8명으로 출발해야 했다.
1군에 합류하기로 한 1986년까지 어떻게든 선수들을 모으느라 혈안이 돼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 1년 사이에 공개테스트를 열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각 구단이 계약을 포기한 경력직들을 끌어들이고, 그리고 또 그해 대학을 졸업하던 한희민과 김상국 등을 엮어 간신히 50여 명의 머릿수를 채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양으로나 질로나 당분간은 뭔가 승부를 걸어볼 여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30승에 빛나는 장명부와 70년대 실업야구 홈런왕 김우열 같은 굵직한 이름들도 있었지만, 이미 선수로서의 모든 생명력을 소진해 버린 흔적들일 뿐이었다.
그런 이글스가 가까운 미래에 우승에 도전하는 팀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니 몇 해 안에 꼴찌 언저리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무렵 야구를 좀 아는 이들 중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먼 훗날 8, 9, 10번째 창단 구단들이 우수한 신인들에 대한 지명권을 선점하고 기존 구단들의 핵심 외 전력들을 수혈받는 제도적 지원을 받게 된 것과는 달리, 첫 신생구단 이글스는 그야말로 '가을에 씨 뿌리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다.
첫 신생구단, 이글스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와중에 조용히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장종훈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청주의 세광고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을 연고로 창단한 프로팀에서 월급 몇 십만 원을 받으며 선수들의 훈련을 보조하는 일을 하던 소년이었다. 각 구단이 연고지 출신 선수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뽑을 수 있던 그 시절, 그것도 선수가 부족해 리그 합류를 위한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했던 신생팀의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면 선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장종훈이 도대체 누구고, 어떻게 어느 사이에 팀의 정식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이글스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87년, 4월 1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대전 홈경기에 유격수로 등장한 그 낯선 얼굴의 소년은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때린 데 이어 희생타와 밀어내기 볼넷으로 동점과 역전 타점까지 만들어내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반짝이기도 했던 기존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과 주거니 받거니 하긴 했지만 94경기에 출전했고, .270의 타율에 8개의 홈런까지 기록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알바'로 합류해 정식 선수가 되기까지의 19살과 20살 사이, 키가 뒤늦게 자라고 몸집이 커지면서 힘이 붙었고, 마지막 한 올의 기회와 가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듯 쌓아올린 연습이 타구의 비거리를 쭉쭉 늘려갔기 때문이다.
1989년에는 이광길이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하면서 그는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았고, 그렇게 출전 시간을 늘리고 경험을 쌓아가며 성적도 끌어올렸다. 1988년에 12개, 1989년에 18개로 홈런 개수를 늘리며 '공격형 유격수'로 이름을 알리더니 1990년, 드디어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에 등극했다. 28개의 홈런도 그 시절엔 역대급 기록이었지만 91개의 타점은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는 1992년까지 3년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특히 1991년에는 홈런과 타점 외에도 안타, 득점, 장타율 부문 타이틀까지 휩쓸었고 1992년에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시즌 40개 이상의 홈런(41개)을 기록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홈런왕'이라는 당연한 수식어 앞에 사람들은 유독 '고졸' 그리고 '연습생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빼먹지 않았다. 더 놀라운, 더 대단한 성공을 드러내기 위한 뜻이었다. 물론 장종훈 본인과 그 부모는 그 단어를 읽을 때마다 고마운 밥이 목에 걸린 듯 쓴웃음을 지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개천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고졸, 연습생 출신, 홈런왕

▲한국시리즈 결승타1999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이 된 5차전에서 결승타점을 만든 것은 장종훈이었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온갖 부상을 안고 뛰던 내리막길의 노장이었지만, 그는 홈런보다 더 귀한 희생뜬공으로 팀에게 유일무이한 우승의 기억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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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성기가 그리 길지는 못했다. 늘 성실하고 또 치열했던 플레이는 그만큼의 크고 작은 부상을 남겼다. 또한 젊고, 학맥으로 엮이지도 못한 강타자가 피할 수 없었던 상대 투수들의 집요한 몸쪽 공에 주눅 들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니 팔꿈치와 옆구리에 골병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131번 투구에 맞았고, 그것은 그가 은퇴하던 시점에 역대 2위의 기록이었다(지금은 SSG의 최정이 그 3배 가까운 공을 맞으며 세계신기록을 만들고 있어 사소한 기록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머리로 성공해본 사람은 불안해질 때마다 머리에 의존하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공해본 사람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의지할 사람을 찾는다. 타고난 것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 당황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런데 장종훈은 노력으로 성공해본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노력에 집착했고, 적절히 쉬고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끝내 도를 넘쳐 몸을 상하고 말았다. 무릎, 팔꿈치, 또 허리와 발목과 손목과 이곳저곳이 고장을 일으키고 미처 회복되기 전에 다시 무리하다가 고장나기를 되풀이하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언제부턴가는 '대한민국 최강의 타자'라는 별명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도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상에 시달리며 수도 없이 떠났다가 돌아왔고, 줄어든 비거리를 단타와 적절한 뜬공으로 바꾸어 팀에 기여하며 타석을 지켰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것은 2002년이었고 마지막 홈런을 기록한 것은, 그가 유니폼을 벗던 2005년이었다. 무려 19번의 시즌이었고, 1950번의 경기에 출장해 남긴 기록은 340개의 홈런과 1145개의 타점이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했고, 무수한 실수와 불운과 실패들에 상처 입고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내려앉으며 묵묵히 기록들을, 그리고 그 이상의 팀에 대한 기여를 쌓아간 선수였다. 그래서 그는 이글스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되었고, 그 팀을 상징하는 선수가 됐다.
사실 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오늘날 이글스 팬들의 필사적인 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비록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어쩌다 보니 암흑기가 길어지고 또 어쩌다 보니 연패와 대패의 수모가 끊어지지 않더라도, 오늘 세상이 끝나고 야구가 끝나는 건 아니라는 듯 웃으며 '최강한화'를 외치는 그 팀 팬들의 기억 한 쪽 구석에 장종훈의 시간들이 저장되어 있음을 모른다면 말이다.
개천에서 난 용, 미꾸라지들의 희망이 되다

▲홈런왕 장종훈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했지만 가장 높이 날았고 가장 멀리 날았던 독수리였다. 팬들은 그를 잊지 않고 그가 만든 팀을 잊지 않는다. 사진은 2005년 9월 15일 장종훈이 경기에 앞서 두아들 현준(오른쪽), 현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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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난 용은 희망의 증거일까, 개천을 강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신기루일까. 장종훈 역시 신생팀이라는 특이한 환경과 뒤늦게 맞은 성장기의 행운, 그래서 스카우트들의 눈을 벗어난 곳에서 발견된 재능과 그 재능에 의지할 수 없어 스스로를 몰아붙인 초인적인 노력 같은 아주 특별한 요소들이 겹치고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진 예외적 사례였다. 그의 성공은 '연습생'에서 '신고선수'를 거쳐 '육성선수'라 불리게 된 이들의 공간이 개천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수많은 다른 이들의 노력을 얕잡아보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박경완, 서건창, 김현수 등등을 거쳐 박준영에 이르기까지, 처음 계약금 란이 비어 있는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을 때 그들 중 질끈 감은 눈앞으로 장종훈의 이름을 겹쳐 떠올리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와 공을 한 번 더 힘껏 움켜쥐고 일어설 때, 장종훈이 날린 홈런의 그 까마득하던 궤적을 떠올려보지 않았을까.
개천에서는 용이 나기 힘든 법이지만, 용이 난 적이 있는 개천이라면 미꾸라지들도 조금은 더 힘을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실개천도 어디선가는 샛강을 만나고 바다로 이어지게 되며, 용을 쓰는 미꾸라지들이라면 언젠가는 활개 칠 수 있는 날도 만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서 난 용이 그 개천을 잊지 않는다면, 미꾸라지들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홈런왕으로 이름을 날린 뒤 대전의 한 대학에서 입학을 제의해 왔을 때를 회상하며 장종훈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나온 아빠가 되고 싶어 수락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나를 보고 희망을 가졌던 숱한 고졸들은 뭐가 되겠나 싶었다."
주제넘게 용을 쓰기만 한다면, 미처 용이 되지 못하더라도 미꾸라지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것이 이글스의 팬들이다. 그들은 이미 장종훈이라는 용의 승천을 보았고, 그 용이 자신을 키운 개천을 떠나지 않기로 하는 마음을 보았으며, 삶에는 그런 일도 있고 야구에는 그런 맛도 있다는 걸 그런 그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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