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설립의 주역들서강대 설립에 앞장섰던 예수회 신부와 수사들이 1950년대 말 촬영한 사진이다. 아랫줄 가운데가 킬로렌 초대 학장이다.
서강대
한국 천주교의 요청에 따라 1948년 9월 교황 비오 12세는 대학 설립을 윤허했다. 설립 작업이 미국 예수회 위스콘신관구로 이관되자 레오 번즈 관구장은 건축 경험이 있고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킬로렌을 1955년 10월 한국에 파송했다. 킬로렌은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57년 서울 노고산 자락(마포구 신수동) 토지를 구입해 건물을 짓고 문교부 인가를 얻어내는 등 개교 준비에 힘썼다.
노고산은 1933년 망우리 공동묘지가 들어서기 전에 인근 주민이나 처형자들의 매장지로 쓰이던 곳이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새남터에서 참수된 프랑스 출신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도 이곳에 묻혔다가 관악산 옆 삼성산을 거쳐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와 대학원 학생들이 공부하는 삼성가브리엘관 앞 잔디마당에 세 사제의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대학 이름은 한강 중에서도 광흥창 앞 일대를 가리키는 서강(西江)이라고 정했다. '새우젓 동네'를 연상시킨다며 반대하는 이가 많았으나 초대 학장에 내정된 킬로렌이 주변 지명을 따서 짓는 것이 대학의 오랜 전통이라며 고집해 관철했다. 서강대는 1960년 4월 18일 문을 열었다가 하루 만에 4·19 혁명이 일어나 한동안 휴교해야 했다.
킬로렌은 의욕이 넘쳤다. 서울대 이희승 교수와 고병익 교수에게서 각각 한국어와 한국사도 배웠다. 한국식 이름은 이희승 교수가 예수회 창립자 로욜라 이름에서 첫 글자를 따고 '좋은 길로 이어진다'는 뜻을 담아 지었다. 한국을 깊이 알고 싶어서 방학이면 학생들과 함께 제주도, 설악산, 동해안 등 명승지와 산골 오지를 누볐다. <경향신문> 기고문에는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시골 민가에서 처음 자던 날 방바닥에 어깨와 등이 꽉 닿아서 몹시 아팠다. '이런 것도 못 참으면 어떻게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고 자책하며 참기를 계속했다. 어깨를 주먹으로 때리면서 '이놈아 참아라' 하고 큰소리로 꾸짖는 것을 보고 주인집 식구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지기도 했다. 이제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불편 없이 할 수가 있다."
길로연은 196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학장 겸 신부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학생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남녀 학생들에게 포크댄스를 가르쳐 동료 신부와 교수들에게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는 걱정과 핀잔을 듣기도 했다. 1964년 학생들이 한일협정 회담에 반대하며 벌인 단식 투쟁에도 동참했다. 기자들이 까닭을 묻자 "자식 같은 아이들이 밥을 굶고 있으니 나도 밥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함께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은 요람 같은 나라... 그 포근함 속에 잠들고 싶어"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중국적이 허용되는 특별귀화제도가 없어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경향신문>에 귀화를 결심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한국은 작고 가난하지만 포근한 요람 같은 나라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강산이 포근하고 가난을 이기려는 성실한 마음들이 더욱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 포근함 속에 안겨 생활하고 그 포근함 속에 묻혀 잠들고 싶다."
학생들의 잠재력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젊음을 대표하고 한국의 미래를 예시하는 학생들 속에 묻혀 생활하는 동안 그들의 소박한 감수성과 깊은 사고력에 놀랐다. 리포트를 받아볼 적마다 얼마나 깊고 체계적인 사고 능력과 철학을 발견하는 힘을 가졌나 감탄하곤 했다. 나는 이들에게 결핍된 명랑성, 활동성만 길러준다면 세계 어느 나라 청년보다 우수한 청년이 되리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길로연은 1963년 7월 존 데일리 신부에게 학장 자리를 물려주고 학생처장을 맡았다. 그해 초겨울 성심여고 3학년생 이영자와 처음 만났다. 세례명은 요안나인데 미국식으로 조안 리라고 불렀다. 당초 서울대 심리학과를 지망했으나 중국인 성심여고 교장 주매분 수녀가 서강대 진학을 권유했다. 주 교장의 소개로 길로연을 만나 캠퍼스를 둘러본 뒤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조안은 길로연의 번역 일을 도와주며 가까워졌다. 등산과 영화를 함께 즐기고 조안 자취방에도 가끔 들러 차를 마셨다. 둘 사이가 연인 관계로 소문이 나자 예수회는 1966년 길로연을 전남 광주의 대건신학대 학장으로 발령냈다. 몸은 멀어졌어도 둘은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으로는 더 가까워졌다. 신부와 평신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넘어 진짜 연인이 된 것이다.
1967년 결혼을 약속하고 주변에 털어놓았다. 당시 길로연은 48세, 조안은 22세였다. 두 집안은 물론 예수회와 학교 측 모두 발칵 뒤집어졌다. 비난의 화살은 조안에게 집중됐다. 그녀의 자서전에 따르면 집안에서야 "철딱서니 없는 딸년"에 그쳤지만 바깥세상에서는 "멀쩡한 신부를 유혹해 타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재산까지 뺏으려고 결혼까지 꿈꾸는 마녀"로 손가락질 받았다. 학교에서도 자퇴를 종용했으나 조안은 꿋꿋이 버텼다.
예수회는 길로연을 성모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시켰다가 조안이 수소문해 병실을 찾아오자 아예 미국으로 보내 버렸다. 길로연은 위스콘신관구장 지시에 따라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자신의 결혼 결정이 옳은지를 두고 기도와 묵상을 거듭한 끝에 조안을 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예수회를 탈퇴하고 신부직도 내던졌다. 조안은 1968년 졸업 후 미국으로 날아가 길로연과 재회했다.
"그런 일 가끔 있는 외국 아니라서 더 충격적"
그렇다고 곧바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길로연은 사제복을 벗었지만 가톨릭 신앙까지 버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품성사를 받으면 환속하더라도 혼인성사를 받을 수 없다. 가톨릭교회를 벗어나 결혼할 수도 있었지만 길로연은 교황청에 탄원서를 보내고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교황 바오로 6세의 허락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단 혼인성사를 하객 없이 최대한 간단하고 비밀스럽게 여는 조건이었다.
1968년 8월 30일 시카고 록후드성당에서 대교구장(추기경) 집전으로 정식 부부가 됐다. 당시 <주간경향>은 '聖職(성직)도 버린 뜨거운 사랑'이란 제목과 '한국인 아가씨 이영자 양과 碧眼(벽안)의 킬로렌 神父(신부)와'란 부제 아래 "이 충격적인 사건의 발생지는 그런 일이 가끔 있는 외국이 아니라 아직은 그런 사건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한국의 서울이었으니 더욱 충격적"이라고 썼다. <서울신문>은 "전쟁 같은 결혼"이라고 소개했다.
길로연은 일리노이 공대에서 강의하고 조안은 일리노이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 안젤라(길성미)에 이어 1972년 에이미(길현미)를 낳았다. 조안의 친정 부모는 외손녀 둘이 태어난 뒤에야 딸의 결혼을 인정하고 길로연을 사위로 받아들였다.
길로연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기업 메탈 데코의 마케팅 책임자가 됐다. 조안은 캘리포니아 주정부 자문관으로 일했다. 1973년 여름휴가 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다가 5년 사이 급발전한 모습에 놀랐다. 파탄으로 끝날 것을 우려해 둘의 결혼을 만류하고 비난하던 이들도 이제는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래서 아예 눌러앉기로 했다.

▲조안은 조선호텔 PR 매니저와 세계 최대 PR회사 버슨-마스텔러 한국지사장을 거쳐 PR 전문회사이자 헤드헌팅 업체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하는 등 1세대 여성 사업가 겸 PR업계 대모로 활약했다. (자료사진/김주형 기자 르페르 2004.5월호)
연합뉴스
길로연은 홍익대 교수로 부임해 특수대학원장과 한미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조안은 조선호텔 PR 매니저와 세계 최대 PR회사 버슨-마스텔러 한국지사장을 거쳐 PR 전문회사이자 헤드헌팅 업체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하는 등 1세대 여성 사업가 겸 PR업계 대모로 활약했다. 코엑스 국제산업박람회 유치, 1988년 서울올림픽 해외 홍보, 차세대 전투기(FX) 사업 F18 한국 홍보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1994년에는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을 펴내 화제를 모았다. 길로연은 1986년 7월 3일 미국 애플턴의 남동생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안은 2022년 9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눈을 감았다.
큰딸 길성미는 BTS와 '기생충' 미국 진출 진두지휘
조안은 두 딸을 외국인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가 그만두게 하고 석 달간 따로 한국어를 공부시킨 뒤 이화여대 사범대 부속 초등학교에 보냈다. 두 나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해 아이비리그 명문대인 컬럼비아대와 브라운대를 각각 졸업했다.
▲미주한인위원회(CKA) 회장이 된 안젤라 성미 킬로렌.
CKA 홈페이지 갈무리
어머니의 바람과 기대대로 길성미(안젤라 성미 킬로렌)는 한류의 전도사이자 두 나라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해내는 일꾼이 됐다. 2011년 CJ ENM 아메리카에 입사해 한류 콘텐츠 홍보 마케팅을 맡다가 대표를 지냈다. 미국에서 2014년 그룹 BTS의 데뷔와 비비고 브랜드 진출, 2020년 영화 <기생충>의 개봉 등을 진두지휘했다. 지난 5월 12일에는 미주한인위원회(KCA) 회장으로 선임됐다. 중국계 미국인 남편 사이에 아들 하나(가브리엘)가 있다. 스위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길현미는 프랑스인과 결혼해 딸 둘(니나, 다프네)을 두었다.
조안은 오늘날을 예견한 듯 1997년 펴낸 에세이집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딸처럼 제3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은 아직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10년 후, 20년 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극소수로 남아 있을 것인가? (중략)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내일은 눈부신 다양성들이 저마다 활짝 피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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