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원경> 속 원경왕후. 원경왕후 덕에 여산현안 여산군으로 승격할 수 있었다.
tvN
여산은 '여산 송씨'의 본향으로, 지금도 휴게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 말 문신이던 시조 송유익의 묘가 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드라마 <원경>(tvN)의 주인공인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어머니가 바로 여산 송씨였다. 아들 세종이 임금이 되고 18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 원경왕후 외가의 본향인 여산현을 여산군으로 승격해 줬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다시 주목을 받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아버지가 여산 송씨였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관비가 되었지만, 세상을 떠나고 18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다시 왕후로 추봉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99년 여산군도 여산도호부로 승격된다.
여산에서 태어나거나 살지 않았던 두 왕비와 달리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는 여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36년 아버지 조창원이 여산군수로 오면서 그도 잠시 여산에서 머물렀다.
이 정도면 여산을 '왕비의 고을'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여산군을 거쳐 여산도호부가 된 뒤 여산은 많은 것을 누렸다.
여산도호부가 관할하는 고을은 여산을 비롯해 임피현, 옥구현, 함열현, 용안현, 익산군, 고산현, 진산군, 금산군, 용담현, 군산진 등 모두 11개였다. 지금의 전북은 물론 충남 논산의 지역들까지 아우를 만큼 넓었다.
1896년에 전라남도와 북도가 나뉘면서 북도엔 전주, 고부, 구례, 김제, 여산, 옥구, 익산, 정읍, 태인, 함열 등 26개 군이 남게 되는데, 절반이 넘는 14개 군의 치안을 맡은 곳도 바로 여산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전라도엔 군사가 주둔하는 다섯 개 진영(전·후·좌·우·중영)을 두게 되는데, 이 가운데 후영이 여산에 있었다(전영은 순천, 우영은 나주, 좌영은 운봉, 중영은 전주). 처음엔 여산도호부도 이웃 남원이나 무주처럼 종3품 도호부사가 수령으로 오다가 나중엔 도호부사가 군대의 사단장이라고 할 수 있는 후영장까지 맡게 되면서 정3품 당상관이 부임하게 된다. 정2품 전라도 관찰사를 빼고는 전라도에서 가장 높은 품계였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여산부사 유제관의 판결선고서. 다행히 큰 처벌은 받지 않았다.
국가기록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산부사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유제관이다. 1894년 가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한양으로 나아가는 길에 여산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여산부사였던 유제관이 농민군에게 쌀 300석과 짚신 3000켤레, 소 7마리를 내놓으며 힘을 실어준 일이 있었다. 훗날 그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이 일은 동학농민군이 내걸었던 '제폭구민 척왜양'의 기치가 생각보다 널리 공감을 얻었다는 걸 보여준다.
얼마 뒤 공주 우금티를 비롯해 곳곳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속절없이 밀려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오랫동안 신분을 숨긴 채로 숨죽여 살아야 했던 동학농민군에게, 여산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은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처음 발을 디딘 천주교의 성지, 여산
여산은 천주교와도 관계가 깊은 고을이다. 1845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해 10월 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는데, 이곳이 여산도호부 북일면(지금은 망성면 화산리)이었다. 넓적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금도 '나바위성지'로 불린다.

▲100년 넘는 세월을 지켜온 나바위성당의 모습
연합뉴스
이곳에 1882년 나바위공소에 이어 1906년엔 나바위성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화산 꼭대기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배인 '라파엘호'를 본떠 만든 기념탑이 서 있다.
그래서일까, 여산면 태성리 성치마을에선 무려 세 명의 주교가 태어났다. 1905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김현배 주교(바르톨로메오)를 시작으로, 1941년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병호 주교, 그리고 다시 20년 뒤인 1961년 태어난 김선태 주교(사도 요한, 제8대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장) 등이다. 노령산맥 줄기인 천호산 산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마을엔 1860년 무렵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산엔 천주교 신자들이 겪은 아픔도 깊게 새겨져 있다. 조선 말기 숱한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은 병인박해 때 여산 주변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인들이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던 여산으로 끌려와 백지사형을 당했다. 물에 적신 백지를 얼굴에 여러 겹 발라 숨을 끊는 끔찍한 형벌이다. 여산엔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백지사터'와 '여산숲정이순교성지'가 있다.
여산이 힘을 잃은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1912년 호남선 철길이 옛 이리를 지나면서 이리가 커지고 이웃 고을인 익산(군)도 커졌다. 지금의 익산경찰서도 일제강점기이던 1919년 8월 여산에 처음 들어섰다가 몇 달 뒤 옛 이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여산면은 황화면, 망성면, 낭산면 등으로 쪼개진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가 여산을 지나게 되고 고속도로 휴게소도 문을 열었지만, 여산은 더는 도호부 시절의 그 여산이 아니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번쩍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오다.
여산에서 태어나 여산에서 생을 마친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 <별>이다. 그는 시인이자 한글학자였고,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을 지키려 애썼던 독립운동가였다. 1891년 그가 태어난 옛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엔 그의 생가와 가람문학관(여산면 가람1길 64-8)이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옆에 자리한 가람 문학관.
가람문학관
여산의 시간은 저물었고, 지난해엔 휴게소 이름에서조차 '여산' 두 글자가 지워지고 말았다. 여산의 시간은 다시 올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혹시 이번 휴가 때 '익산 미륵사지 휴게소'를 지나게 되면, 그곳이 한때 '왕비의 고을'이었고, 동학농민군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한 끼 먹인 곳이었으며, 김대건 신부가 처음 발을 디딘 천주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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